날씨가 부쩍 추워졌습니다. 이른 아침, 고양이 사료를 주러 나가며 옷을 잔뜩 껴입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추위로 아파트 정원 내의 인기척도 뜸해진 풍경입니다. 발부리에 이리저리 뒹굴어 밟히는 낙엽 소리만 정적을 깨더군요. 사각사각 휘익.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송과 단풍 이파리들이 마치 하늘에서 굵은 눈송이를 뿌리는 것 같은 착각에 빠뜨리게 했습니다. 부리나케 세 곳을 돌아 사료를 주고 나서 느긋하게 멋진 풍광을 즐기기로 했지요.
청소노동자들의 손길에 의해 쓸려나가기 직전에. 추위도 잠시, 이 가을날의 마지막 동화를 부여잡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으니까요. 비록 우거진 숲길은 아니지만 잘 가꿔진 아파트 내 정원을 휘젓고 다니니 떠오르는 시구가 있었습니다.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젊은 날 한때, 입가에 읊조렸던 레미 드 구르몽의 ‘낙엽’이란 시(詩) 한 구절입니다. 버버리 코트 깃을 살짝 올리고는 센티멘털한 기분에 빠져 덕수궁을 거닐었던 시절이 있었죠. 그런데요, 나이 든 지금은 같은 현상을 두고 냉철한 철학적 사유에 이끌리게 되었어요. 감정의 객관화라고 할까요.
지난날 단순 감정이입에 휘말렸다면, 지금은 나무들의 생존방식인 낙엽 떨굼 현상을 우리네의 성장통과 진배없다는 생각에 들었지요. 낙엽 떨궈 황량해진 숲을 이듬해 봄 풍성한 숲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는 자정 능력은 나무들 서로가 연대하고 강인해질 수 있도록 땅속 보이지 않은 곰팡이들의 존재가 지원 사격해주었기에 가능했음을. 우리 성장의 역사에도 잘 난 자신이기보다 알게 모르게 작용한 힘들이 자리했음을, 숙연해지는 순간이었죠.
이 같은 생각의 진폭이 깊고 넓어지면서 자기객관화는 자연스럽게 다가왔습니다. 어느새 책상 머리맡에 둬 틈틈이 읽고 있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젊어서부터 귀동냥으로 알던 책이었으나 그땐 왠지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흰머리 날리는 나이에 귀한 배움의 기회를 갖게 되었어요. 술술 읽히는 책이 아니라서 읽는다기보다 공부한다는 표현이 걸맞지 않나 싶습니다.
니체가 권유하는 ‘행복론’을 소개합니다(행복이 넘치는 섬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이 주제가 모든 이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관점에서 행복론을 펼칩니다. 첫째, 거짓된 신(神) 관념에서 벗어나라는 권유. 둘째,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창조자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무기력하게 어떤 신의 존재에 의존적으로 살지 말거니와. 어떠한 인생의 성적표를 받게 되더라도 그 결과에 따라 좌고우면 영향받는 것이 아닌,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인생 전반에 걸친 지속가능한 과정을 가감 없이 펼치라는 겁니다.
니체는 책 머리말에서 사람들은 잘못된 행복을 진정한 행복으로 착각해 살고 있다고 여러 번 지적합니다.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지적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르떼(德 또는 탁월성)의 개발로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이에 그의 주장을 보탭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탁월성을 거론할 때는 육체가 아닌 영혼의 탁월성을 일컫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 있을지, 진지한 물음을 자신에게 던질 때가 바로 낙엽 나뒹구는 11월, ‘들겨울달’인 것 같습니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로 이어가겠습니다. 늙은 어부인 산티아고가 돛단배에 의지해 나간 바다 위에서 청새치와의 처절한 과정을 그려낸 단편소설입니다. 엄청난 크기와 힘으로 버티는 청새치와의 사투를 벌이고 난 후 끝내 잡고야 말죠. 청새치를 배에 매달아 안도하며 귀환하는데, 어이없는 일을 또 겪습니다. 난투 중에 흘린 피의 냄새로 상어들이 몰려든 거죠. 상어의 밥이 되어 뼈만 앙상해진 청새치는 승전의 성과물로 내세우기엔 혼절할 일입니다.
언뜻 허망한 결과로 보이지만 여기서 놓치면 안 될 반전의 섬광과 맞닥뜨리게 되죠. 작품에서 향유하고자 했던 ‘노인의 행복’은 고기를 잡고 있는 ‘충실했던 순간순간’에 방점이 찍혔으니까요. ‘결과’가 아닌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과정’을 더 부각시킵니다. ‘사람은 지려고 태어난 건 아니다. 사람은 죽음을 당하지만 지지는 않는다.’란 작품 속 노인의 말처럼. 헤밍웨이가 독자에게 던진 강렬한 메시지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어쩌면 우리 삶을 통틀어 니체의 ‘행복한 섬’에 다다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하게 살아낸 찰나의 점들 하나하나가 행복에 이르는 정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명상을 통해서 실제로 경험한 일이었어요. 모든 일들은 찰나의 한 점 한 점임을요. 성공도 한순간이며, 실패도 찰나에 지나지 않고, 즐거움과 슬픔도 한때 지나가는 무형일 뿐. 분명한 건 얼마 후면 그 지점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그 지점마저 사라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이룬 정점이 세간에서 주목받지 못할지라도, 그때 최선으로 임한 자신이었다면 긍정의 마음을 지녀도 될 일입니다. 내가 먼저 나를 인정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인정하겠습니까.
“살면서 내 인생은 왜 이리 풀리지 않는 걸까.”라는 푸념에 젖은 적은 없나요. 누구나 겪었을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일에 있어 잘 되지 않을 걸 미리 걱정하기보다, 그에 먼저 내가 최선의 마음을 바치고 있는지에 방점이 찍혀야겠지요. 자신이 최선을 다했으면 그만이요 떳떳할 일이란 겁니다. 속세 기준에서 매겨진 성과물에 눈이 흐려져 자신을 걸지 않기를요. 이 늙은이가 지금껏 살아보니 참 맞는 진실입니다.
사색에 젖어 철학자가 되어 본 오늘 하루였습니다. 여러분, 각기 다른 색조로서 ‘행복한 섬’을 꾸며가길 바랍니다. 니체의 말처럼, ‘당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길이 행복을 유지하는 길’임을 마음껏 외치면서요. 아모르-파티(amor-fa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