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탐방 현장에서 사실(史實)을 마주하다

by 정미영

모 재단에서 주선한 ‘여순항쟁’ 역사기행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다뉴브강의 학살현장이 동시에 떠올랐습니다. 정지아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지리산을 향해 끓어오르는 마음이 최대치에 이른 무렵, 참혹했던 그곳에 뒤늦게 발을 내딛고 왔던 겁니다. 학교운동장이 손쉽게 접할 학살의 현장이자 공동묘지가 되었다니. 그렇게 어이없게 죽은 영혼들을 ‘간문초교’와 ‘원촌초교’ 운동장 너른 공간에서 느닷없는 조우로 만나게 될 줄은.

‘역사’란 사건의 ‘배경’과 ‘원인’ 그리고 전개되어온 ‘결과’가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달렸으며, 그 전 과정이 연계돼 설명되어야 함을 일깨워 준 장소였습니다. 즉 역사적 사실(事實)은 팩트가 아닌 사료로서 규명된 사실(史實)이어야 한다는 점도 숙지하게 되었지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다뉴브강이 있습니다. 몇 해 전 TV프로그램을 통해 투영된 부다페스트 야경은 황홀하기 짝이 없었죠. 수백 년간 유지해왔던 그 나라의 아름다운 석조전에서 눈을 뗄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슬픈 사연이 담긴 ‘다뉴브강의 신발들’이 카메라 앵글에 초 근접되면서 긴장 모드로 전환됐습니다.

신발을 벗은 유태인들이 다뉴브강가에서 일렬로 총살을 당한 곳이란 구슬픈 내레이션이 흘렀어요. 1944년 헝가리 나치정당의 학살로 인해 그 나라를 이끈 주역의 반 이상이 희생되었다고 하니. 헝가리가 겪은 수난의 역사는 참담했던 우리 역사와 매우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종시 연기면에서 국민보도연맹학살(國民保導聯盟虐殺) 사건 희생자들의 발굴기사는 2018년 무렵에 나왔습니다. 그때 무더기를 이룬 양민들의 검정고무신 사진이 ‘다뉴브강의 신발’과 포개지며 숨을 멎게 하더군요. 1950년 우익 관변단체인 보도연맹에서 무차별적으로 자행한 양민대학살이었죠. 보도연맹에 의해 억울하게 연루돼 숨죽이고 살아온 자손들은 어머니들이 겪었던 어마 무시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아무 연관 없는 타자에게 엄감생심 털어놓을 생각을 엄두도 내지 못했습니다. 쉬쉬 숨죽여가며 있는 듯 없는 듯 투명한 존재로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연좌제에 묶여 사회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한 어떤 후손은 결국 인권운동가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하죠. 6•25가 발발한 1950년, 나는 겨우 세 살이었습니다. 서울이 아닌 그 지역에서 태어났다면 나도 이 세상에 없을 목숨일지 모르겠습니다. 단지 부역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젖먹이 애든, 부녀자이든, 가리지 않고 저지른 보복의 굿판이 한바탕 휘몰아쳐 갔으니까요. 같은 종족끼리 혹은 마을사람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반복의 참상이라니. 세계 어느 역사 속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비화로 기록되겠지요.


비록 늙은 몸이지만 역사탐방의 현장에서 내 눈은 초롱초롱 빛납니다. 오래전부터 혁혁한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싶은 욕구를 부쩍 키워왔습니다. 대부분은 죽기 전에 가봐야 할 여행명소를 손꼽는데 비해,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 부지런히 의미 있는 역사 현장을 돌아보기로 했어요. 역사는 내가 살고 있는 시대에 속한 이들과의 실존적인 조건 때문에 그 시대상에 얽매일 수밖에 없는 실체가 아닌가요.

현실 속 제약 속에서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역사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이, 내 생존의 그 어떤 과제보다 우선한다는 판단은 흔들릴 일이 결코 아니었어요. 시대 흐름의 역사성이 잘 규명되어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제대로 숨 쉬며 살아갈 수 있지 않겠어요. 이제 내 여생이 허락한다면 짬짬이 이런 행보로서 참담했던 그 후손들의 손을 잡아주고 기억의 시간으로 지니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들에게 빚진 마음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으므로.


릴레이 다음 탐방은 광주 망월동 5•18묘역이었습니다. 광주항쟁의 배경이 된 영화, ‘1987’을 재방을 통해 다시 보았습니다. 악명 높은 대공 수사처 박차장은 억울하게 끌려온 사람들에게 교도관의 강압적 수사를 정당화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좌익세력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자신의 부모를 두 눈으로 똑똑하게 기억하노라고. 그래서 철천지원수인 빨갱이 도발에 나섰다고---”

저 걸러지지 않고 횡행하게 나도는 저 막된 ‘빨갱이’란 말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세상에서 떨떠름할 뿐입니다. 저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아무나 걸려들게 파놓은 함정에 불과하며, 그들이 표방하는 퇴색된 이념정쟁의 소산이니까요.

혼란기 1987년, 시청 앞 광장에서 빗발치는 최루탄 함성에서 나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어요. 정부 통제하의 독점 언론보도에 온전히 속아 안온함에 젖어 살던 시기였습니다. ‘역사는 더디지만 진화한다.’는 고 노무현대통령의 어록처럼 어느 역사의 진실은 캄캄한 시기를 거칠 뿐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있더군요. 짐작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던 그들의 진상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했습니다.

황폐한 삶의 연속으로 정신이상자가 되고, 평생 고칠 수 없는 병을 얻어 고생만 하다가 산화한 의인들로 인해 울컥했습니다. 역사의 총책인 독재자 전두환은 사과의 말 한마디 없이 숨을 거두고 말았죠. 섣부른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통한의 시간이 채 끝나지 않아 그를 떠나보낼 수 없었는데. 그런 그가 멀쩡하게 살다가 명대로 살다간 죽음을 맞다니요.


우린 왜 해방 이후 이념의 틀에 갇혀 사회갈등을 조장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양성이 요구되는 이 시대인 만큼 이를 뛰어넘어 국민화합으로 이끌어낼 에너지로 승화시킬 수 없는 걸까요. 분단된 나라의 유일성 때문에 세계정세 상 특수상황에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내 가까운 친지조차 서로 만나 얼굴을 붉히는 일로 번진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나는 저편의 입장을 들으려 몸을 낮췄지만 그들은 완강했고, 우리 편 소리를 들으려하지 않고 아예 거부하더군요. 우리 편에서 유리하게 조작한 것이라는 그들의 선입견 때문이었지요.

나는 젊어서부터 떠도는 소문에 일절 반응하지 않고 직접 경험해서 알아낸 결과수치만 신뢰합니다. 반면 내 주변 사람들의 다수는 떠도는 잘못된 정보에 의지해 그것이 사실인 양 따르는 이가 의외로 많더군요. 특히 역사문제는 위정자의 입지에서 잘못 기록된 일이 적지 않은데 이조차 모르는 이가 적지 않았어요. 어떻게 그리 쉽게 믿을 수 있는 걸까. 잘 모르는 일은 차라리 모른다고 말하면 될 것을, 얻어진 정보의 파편만으로 아는 척 하는 게 그들의 문제였죠.

『위험사회(危險社會, risk society)』의 저자 올리히 벡은 왜 이 같은 한국사회를 아주 특별한 위험사회라 말했는지 이제 알겠습니다. 좌파•우파 이념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지정학적 요인에 갇혀 갈등의 양산을 부추기는 우리사회에 드리워진 그늘을 그는 제대로 바라봤을 테니까요. 과연 내 생애에 걸쳐 이 같은 점을 해소할 길이 정녕 없는 걸까. 수많은 나라 중에서 하필 이 나라에 태어난 이유는 뭘까요. 이로써 재조명 된 역사의식을 지니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깨우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야 덜 괴롭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대처할 수 있지 않겠어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다양한 삶 존중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