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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삶 존중사회

by 정미영

짝을 이루지 않기로 결심하고 산 지 40여 년이 넘었습니다. 요즘 결혼은 선택사항이지만, 당대에는 필수적 인륜지대사란 사회인식이 팽배했던 시절이었죠. 당시 여성들은 특수 전문직이 아니면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는 게 통념이어서, 경제력을 거머쥔 배우자와는 종적 관계에 놓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에 반해 홀로 선 일은 종교적 출가가 아니면 낯선 시선을 감수할 일이었지요. 솔로를 선언한 여성은 지금처럼 다양한 삶의 생활인으로 인정되지 않을뿐더러, 호기심과 비난 그리고 조롱거리 뒷담화의 대상으로 추락하곤 했습니다.

지금은 많이 누그러진 사회분위기 이지만 아직도 ‘혼자’에게 초면의 사람이 던지는 묘한 시선은 불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예 대놓고 강한 성격의 소유자일 거란 근거 없는 낙인을 찍어낼 때는 아연실색할 일이었죠. 솔로의 선택은 단지 생존의 문제였으며, 대단한 용기와 결단에 의해 내린 결정이 아닌, 주위를 돌아봐도 그보다 더 나은 자리가 없다는 판단에 기인했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결혼의 관문은 내게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이렇듯 내게 일어난 일과 그 이유를 곰곰이 되새기며 숙성의 시간을 거쳤습니다. 아닌 길로 들어서고자 애쓰지 않고 가능한 길을 찾아가는 것으로 선회했던 겁니다. 급기야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일을 찾아냈으나 시대를 앞지른 까닭이었는지 혹독한 성적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지난한 과정을 거쳤지만 나쁜 결과로 안겨오지 않았습니다. 아픈 일로서의 마침표로 찍힐 수 없을 만큼, 이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냈다는 자긍심 때문입니다. 감당하기에 쉽지 않던 일, 말도 안 되는 논쟁에 말려 마음을 애태우던 시절이었지만, 옹골찬 마음으로 둥지를 틀었던 흔적들은 지금 돌아봐도 뿌듯합니다.


첫 둥지를 튼 건 사회사업이었습니다. 당시 정부의 노인복지 지원은 ‘불우 노인’만 대상이었습니다. 누구나 노인이 될 텐데 언제까지 선택적 복지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가라는 의구심이 생겼죠. 망설임 없이 내 노후를 위해 ‘일반노인’을 대상으로 한 사업에 호기롭게 첫 삽을 떴습니다. 실비형 노인복지 사업을 민간주도인 나의 재정으로 시도한 일이었죠.

요즘 요양보호사업의 전신으로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을 때 모험을 건 시도였습니다. 시작이 어려웠던 만큼 긍지와 보람은 배가된 일이었습니다. 노인 돌봄 위탁가정으로부터 감사의 말과 응원을 받은 일로 충만했으니까요. 그렇게 자리를 잡아가나 싶던 사업은 1997년 IMF외환위기란 복병을 만나 다시 고초를 겪게 됩니다. 재정압박의 가정에서는 노인에게 지급될 돌봄 비용부터 줄여갔고, 그로써 수급자 또한 눈에 띄게 줄어갔던 때문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기존 간병사업자와 파출부사업 유사업체에서 우리가 하는 일을 벤치마킹해 유리한 고지를 취하려 들면서 우리 운영에도 혼전의 양상을 띠었죠. 이런저런 사유로 결국 사업을 접게 되었고 억대의 자본금은 공중 분해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요양보호제도 민간사업에 밑거름이 되어준 일로써 후회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크나큰 상속자산을 사회 환원한 일입니다. 벼락 치듯 치른 행동이 아닌, 오랜 숙성을 거친 준비된 일이었습니다. 아직도 나이든 사람들의 기부가 장학금에 머문 것을 보면서, 나의 생각은 사뭇 달랐습니다. 장학금 기부가 피증여자의 교육향상에 긍정적인 면을 끼친 점은 있으나, 그렇지 못한 이들에게는 소외감을 안겼고요. 입신양명의 문화, 유교의 영향을 방만하게 키운 우리사회가 낳은 지나친 교육열을 키워냈다는 문제도 동반했습니다. 배움의 길이 열린 자만 지원사격하는, 그와 같은 쏠림현상은 결국 엘리트사회를 양산하고 나아가 사회 불평등을 낳은 면도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부만 잘해 우월감에 빠진 교만한 일부의 사람이, 권력 카르텔을 형성해 사회 지도층 윗자리를 차지하고 거드름을 피우면서 저지른 해악을 우린 목도하지 않았던가요. 진짜 공부는 사회를 통해 얻어진 공부일 것이며, 인생을 통틀어 영혼을 쏟아붓지 않고서는 참 공부에 이르지 못한다는, 그런 진실에 ‘우리 영혼이 있으리라. 우리 영혼을 담그라.’고 자각했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먹고 자라며, 깨어있는 시민이 많아야 견고한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다는 지론에 나는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 계기로 이 사회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시민단체에 내 손을 내밀었던 것이죠. 그로써 부모로부터 받은 큰 유산을 여러 시민단체에 선뜻 기부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기간 유지했던 내 결심을 실천했음에 비로소 안도했습니다.

다만 기부 이후, 일련의 과정에서 혹독한 일면도 치러야 했어요. 장학생을 위한 기부는 개별적 대상에 한정돼 보람으로 되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반면, 재정이 열악한 시민단체는 기부의 효과가 눈에 띄게 잡히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보람과 성취감을 거두려면 오랜 시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점이 요구된다는 점이죠. 마치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가 제 앞가림을 할 때까지 돌봄이 이어지듯, 아이의 성장기를 묵묵히 바라보듯 인내해야 하는 기다림이었습니다. 이렇듯 가슴 졸이며 세상 밖에 내놓은 자식들 여럿이 내게 있습니다. 초기의 걸음은 고됐으나, 말미로 갈수록 체화된 자력갱생으로 차오를 날도 멀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솔로로 살면서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의미 있는 궤적을 통해 솔로로서의 가능한 세계를 알았고,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우연한 땅에 뿌리내린 여느 생명체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듯, 나 또한 주어진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고 살아갈 뿐이라고, 되뇌듯 내 생각대로 살고 있음에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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