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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과 공동체

by 정미영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태어나 성년에 이르기까지 살았던 도시 한복판의 동네가 변화무쌍한 현장에서 전혀 밀리지 않고 살아남아 있다니요. 옛 기억의 세포들이 골목에 당도하면서 뛸 듯이 걸음보폭에 가속이 붙었습니다. 서울의 변화를 오래 목격한 내게 안긴 이 같은 행운은 쉬이 다가온 일이 아닐 겁니다. 이곳 또한 보존 받을 마을가치로 인정받을 때까지 우여곡절을 거쳤던 모양입니다.

서울 사대문 안, ‘북촌’도 ‘서촌’도 아닌 내 고향 한옥마을이 역사적 가치를 뒤늦게 인정받게 된 것이지요. 원래 서울시에서 근린공원으로 설정했다가 그 지리적 중요성을 되짚게 되면서 도시재생방식으로 복원시켜 놓았다고 했습니다. 자칫 사라질 뻔한 화를 면해 보존된 행복을 누려도 되나 싶었어요. 내 고향의 호사스런 향기에 취해 있을 만큼 의외의 선물을 받아든 기분이었으니까요. 그렇다고 목가적 잔상에 머물러 감성팔이에 나서려는 건 아닙니다.


트로이카 전설의 내 고향은 지금의 ‘돈의문 박물관마을’과 ‘경희궁’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주변입니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지역으로 등극했지만, 내 어릴 적 동네 풍광은 자연의 정취를 듬뿍 담고 있었습니다. 옛 서울고등학교가 자리했던 경희궁터에는 병풍처럼 두른 성곽 위로 하늘을 찌를 듯 숲을 이루고 있었고요. 녹음이 우거질 때, 아카시 향기에 취해 재잘거리며 꽃을 입에 한 움큼 물고 동무들과 뛰어놀던 곳. 캐낸 칡뿌리의 구수한 맛도 그 이후로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한 주전부리가 부족한 때에 우린 그렇게 순한 자연의 맛에 이끌려 유년을 보냈던 겁니다.

당시 어머니들이 이곳에 시집을 와 머리를 맞대고 가족을 이룬 마을공동체. ‘ㄷ’자 ‘ㅁ’자 모양의 올망졸망한 한옥은 여느 집성촌을 방불케 했습니다. 집안 대소사를 자신들의 집안일처럼 서로 거들고, 맛난 음식은 당연히 나눠 먹던 시절이었습니다. 제사 때마다 시루에 찐 두텁고도 실했던 팥 시루떡은 지금과 비교될 수 없는 맛이었고요. 무럭무럭 김이 서린 제사떡을 집집마다 돌렸는데, 식히지 않으려 종종걸음을 냈던 일이 어슴푸레 떠오릅니다.


‘돈의문박물관’을 휘돌아 나오면서 옛적 골목 안의 냄새와 얼굴들이 추억으로 모락모락 피어났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으뜸인 것은 우리 집 어머니표 녹두빈대떡이었지요. 맷돌을 마주 잡은 두 사람의 호흡이 잘 맞는 게 우선입니다. 곱게 갈아진 녹두 안에 돼지고기 고사리 숙주나물 등을 넣고 전을 부치는데 이때 불 조절이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직접 고안해 만든 부침 전용 기구가 있었어요. 거기에 숯불을 집히고 쇠판을 올려 높은 열로 달구어 놓습니다. 석판을 올리고 나면 돼지비계 조각을 빙빙 돌려 바른 뒤에 두툼한 두께로 빈대떡을 노릇노릇 구워냅니다. 맛을 유지함에는 적절한 온도를 조절하는 감각이 중요합니다. 바로 어머니 손끝에서 묻어나온 노련함이었죠. 명품빈대떡이었고 마을에서 칭송이 자자해지자, 어린 나는 어깨를 으쓱댔던 겁니다.


맛 외에 소환된 얼굴들이 굴비 엮여 나오듯 줄줄이 나왔습니다. 구슬 꿰듯 그들을 꿰다 보면 성근 얼굴이 나오기 마련이지요. 무수히 골목 안을 오고 간 사람들, 그리고 잠시 머물다 간 얼굴들이죠. 그런 부서진 얼굴의 조각들 속에서도 발부리에 걸려 되레 또렷해지는 일도 있었지요.

햇볕이 좋은 날엔 누구나 할 것 없이 집 앞에 의자를 내어놓습니다.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이 잠시 멈춰 얘기꽃을 피웁니다. 마을주민들과 손수레 끄는 상인, 머리 위에 한 짐 들어 올린 이동 상인에 이르기까지 너나 할 것 없이 골목 안 주연급으로 충분했습니다. 정기적으로 드나드는 상인들의 입담에 익숙해진 주민들은 기다림 끝에 만난 이들을 가족인 양 반겨줍니다.

모두 함께 형성해 간 골목 안 그림은 서로 융합을 이루며 사람 냄새나는 골목길로 완성해 갔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 시절의 마을공동체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지금, 그때의 얼굴들은 박제돼 버렸고 추억의 외형만이 덩그렇게 ‘마을박물관’으로 변신했습니다.


‘골목’ 하면 내 고장 외에 언뜻 떠오르는 마을이 따로 있습니다. ‘북촌마을’과 ‘서촌마을’처럼 널리 알려진 곳과 달리, 발품을 팔아 일부러 찾아간 곳은 ‘홍제동 개미마을’과 ‘부산 감천문화마을’이었습니다. 그 마을 모두 경사가 가파른 계단을 이룬 산동네이고, 마을 전체가 야외미술관이자 관광명소입니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의 배경이던 개미마을은 화구를 들고 방문했던 곳이기도 했죠. 감천문화마을의 골목은 끝 모를 미로로 이어진, 상대의 옷자락이 스칠 정도의 좁디좁은 공간으로서, 다닥다닥 올망졸망한 집들로 붙어있습니다. 여느 집 말소리가 옆집 벽을 타고 흘러 들어가는 아찔한 분위기마저 연출케 하지요. 이삿짐 이동이 어떤 경로로 가능했을까 하는 궁금증까지 머리 쥐어짤 순간을 맞닥뜨렸고요.

두 마을에서 느낀 점은 가까이 살기에 주고받았을 주민들의 말과 체온이었습니다. 식지 않을 거리의 골목에서 묻어나왔을 법한 온정과 따뜻함이 낯선 방문객들에게도 전도되는 듯싶었습니다. 기회가 닿으면 정겨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곳을 꼭 가보시라.


그런데요, 이런 우리에게 골목만 앗아갔을까요. 각자 바쁜 생활로 코앞에 벌어진 ‘일’만 보이고 ‘관계’는 소원해지지 않았나요. 사람들에게 활짝 뚫린 신작로 ‘길’이란 진일보한 속도와 편리함을 내세우는 차도로만 인식될 뿐입니다. 스피드에 익숙하다 보니 멈춰야 볼 수 있는 소중하고도 미세한 부분을 놓치고 있는 거죠.

경제논리에 반한다며 좁다란 골목길에 도열한 나지막한 주택들을 고민 없이 깡그리 허물어버리고, 높디높은 건물로 하늘을 가리는 요즘 세상입니다. 몇 해 전 연말, 나는 아파트 승강기에 “주민여러분,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밥 한 끼 먹으며 담소 나누어요. 많이 참여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는 글을 써 붙인 적이 있습니다. 그날, 모임 장소에 나온 주민은 딱 한 사람, 아기를 등에 업고 나온 젊은 아낙뿐이었죠.

그 이후로 얼굴 익힌 주민을 집에 초대한 적 있지만, 마음 여는 일에 망설이는 모습을 목격한 이후로는 다시 제안할 용기가 당최 생겨나지 않더군요. 그럼에도 다시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간간이 만나 정담을 나눌 주민이 몇몇 생겨났다는 점이겠지요.

서로 이웃사촌이 되어, 옆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오지랖을 떨던 어릴 적 공동체문화가 그립습니다. 시류를 타고 변화하는 유행처럼 사람들의 관심도 언젠가는 예스러운 문화로 회귀할 날이 도래하지 않을까요. 요즘 일고 있는 복고풍 분위기에 편승해서 옛 패션과 음식에 대한 소비자의 욕구가 증가 일로에 있으니까요.

옛 골목길 위에서 줍게 된 위안의 말들을 모으면 관계란 주제가 더 또렷해집니다. 요즘은 적당한 거리감 속에 겉도는 말을 주고받으며 우린 건성건성 살고 있지 않나요. 그러니 관계성회복이 강하게 요구되는 시기가 요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단한 삶 속에 사람만이 희망이고, 살며 서로를 배려하는 공간이 마을단위로 형성되기를 바라는 마음, 부질없는 욕심일까요. 사라져가는 골목의 문화를 대체할만한 일은 신개념의 마을공동체가 그래서 유일한 대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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