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채식주의

by 정미영

혹서 끝에 달가운 소식이 당도했습니다. 긴 장마에 천정부지로 오른 채솟값이 진정세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비해 턱없이 오른 물가를 실감했지만, 쨍쨍한 햇볕 아래서 제대로 영근 제철 채소를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으로 먹을 수 있게 되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요. 그나마 채소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축에 드니까요.

그런 나의 밥상은 오방색을 띤 채소 퍼레이드로 자못 화려합니다. 식탁 위 메인 자리에 오른 각종 채소들은 알록달록한 색감만으로 침샘을 자극하고도 남습니다. 차려진 다음 찬은 두부와 된장찌개 그리고 버섯류입니다. 두부는 육식 못지않은 단백질원이라 자주 챙겨 먹는 편이죠. 동물성 단백질에 완벽하게 세뇌된 친지들은 육류전멸로 일관된 이 늙은이의 밥상 때문에 훗날 몸이 축날 것이라며 아우성입니다. 심지어 고기 장조림을 장만해오거나, 고기반찬을 택배로 부치는 살가운 이도 있지요. 이렇게 나를 채식주의자로 이끌어준 결정적 계기는 따로 있습니다.


2017년에 상영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옥자’에서 출발했습니다. ‘옥자’는 미 대형축산업체로부터 수탁을 받은 사실을 몰랐던 소녀가 동생처럼 키운 돼지를 말합니다. 주인공 소녀와는 무촌의 감성 돼지로 자라나 청정지역에서 보살핌 속에 튼튼하고 엄청난 슈퍼돼지로 자라납니다. 그런 놈이 상품성을 인정받으면서 소녀 몰래 뉴욕의 한 공장형 축산업계로 조용히 팔려가게 되지요.

팔려간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어린 소녀는 포기하지 않고 파란만장 우여곡절 끝에 ‘옥자’를 다시 집으로 구해 온다는 줄거리입니다. 감독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직접 뉴욕의 한 도살장에 머물며 구역질 나는 온갖 동물들의 냄새를 체험했다고 했습니다. 이후 봉감독도 채식위주의 생활인이 되었다고 하지요.


인간의 욕망에 재물이 된 동물들은 갖은 영양제와 성장촉진제 그리고 항생제로 범벅이 되어 생명체 아닌 상품으로 둔갑합니다. 이렇게 밀집 축산의 그늘 아래 양산된 생명들이 대부분 우리 밥상에 오르는 것이죠. 한 달여 목숨에 그친 병아리, 6개월 정도 살다가 죽음을 당할 돼지와 소가 그런 곳에서 키워집니다.

우린 그들의 그런 죽음을 생략한 채 몸보신에 혈안이 되죠. 동물은 한낱 먹을거리 대상일 뿐이니까요. 게다가 인간중심의 서양 사상은 자본주의와 만나며 최고조를 이룹니다. 도살장의 비위생 그리고 혐오스런 기구가 난무하는 현장 그리고 죽어가는 생명들의 비명을 우리가 목격했더라면 과연 그 사체덩어리를 목구멍으로 넘길 수 있었을까요. 우리 입으로 들어오는 육류의 대부분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입으로 들어오는지 알 만한 사람은 알 뿐이죠.

나는 모 치킨업체 광고화면에서 배우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아짝 소리를 들으면 소름이 돋습니다. 그건 굶주린 하이에나 표정의 각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이에나’를 지칭해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닙니다. 동물은 배고플 때 먹이를 구하는 데에 반해, 인간처럼 장난과 재미삼아 배 터지게 먹어치우지 않습니다. 과잉영양에 살찐 몸을 뺀다고 애꿎은 추가 비용을 뽑는 아이러니는 또 뭘까요. 오로지 인간들의 먹잇감이 되기 위해 태어난 생명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살아있는 생명이 나를 위해 죽음을 당할 일은 없기로 다짐했습니다. 젊어서 즐겨먹던 회도 끊은 지 오랩니다. 돼지와 소가 도살장에 끌려왔을 때 죽음을 직감하고 울음소리를 낸다고 하지요. 도마 위의 횟감용 활어가 만약 울음소리를 낸다면 우린 어떤 반응을 낼까요. 횟감으로 지정되기 이전에 팔딱였던 활어의 모습을, 눈 감은 채 목구멍으로 넘길 자신이 이젠 없습니다. 놈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합리적인 이유를 들이대면서까지 더이상 구차한 내 생명을 잇고 싶지 않으니까요.

우리는 먹을거리가 지천인 세상에 살고 있어요. 옛 임금님 밥상 못지않은, 아니 어쩜 그 이상의 식단을 우리가 즐기고 있지 않나요. 육식 선호에 대한 경종의 하나로, 건강을 위해서라도 육식대체 식품을 식물에서 개발하려는 노력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채식위주의 섭생은 모든 생명들과의 공생관계로서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며,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할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그 일에 고무돼 채식위주의 식단을 더 넓혀가기로 했습니다. 그런 채식식단의 효과는 위장의 소화를 돕고 가벼워질 몸과 살림비용이 절감되는 등 일석삼조를 이룬다는 점이죠.


지금의 나는 ‘완전한 채식주의자(비건)’는 아니며 계란과 해산물 정도를 섭취하는 세미베지테리언(Semi-Vegetarian)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유 대신 두유를 섭취하며 버터도 식물성으로 대체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건이 대중화되지 않아 그에 상응한 외식 전문점을 찾는데 불편함이 있지요. 모임에서조차 별도의 주문을 따로 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비건’들이 날로 증가하는 추세라니 우선 반갑습니다. 고등학생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소리 소문 없이 자리 잡아간다는 소식이더군요. 무자비하게 학살되는 동물들의 고통을 외면하면서까지 평등 • 인권을 내세우는 모순된 자신을 발견하면서 고귀한 실천에 나선 그들이 아닐까 싶어요. 바라 건데 향후 ‘비건’ 전용식당이 눈에 띄게 생겨났으면 좋겠고 관련 매장도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그런 환경이 조성되어야 ‘채식’을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도 늘어날 테니까요.

약자인 동물에 대해 지니는 연민의 마음이, 자신에게 건강한 몸으로 되돌려질 자연계의 현상임을 이 실천으로 느껴보시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신개념의 내 가족을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