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으로 배우는 심리학- 2장 : 맞더라도 상대의 주먹을 보라
우리는 무엇을 보지 않으려 하는가? 상대와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없는 척하며 보지 않는다. 상대의 날카로운 직언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한다. 지금 여기서 생생하게 펼쳐지는 삶에서 이탈해 버린다. 폐부를 찌르는 말은 아프고 자존심이 상한다. 내가 틀렸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지만 자존심 때문에 그런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내가 옳다는 생각을 만들어낸다. ‘내가 옳다는 생각’ 바로 그것이 상대의 주먹이 날아오는 순간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행동이다. 수십 년간 쌓아온 삶의 경험으로부터, 자신의 성공으로부터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쌓아 올리고 그 성벽 뒤로 숨는다.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다. 아무리 과거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시시각각 변하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항상 옳을 수 없다. 복싱에서 상대의 주먹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리면 다운이 되듯 삶에서도 내가 틀렸다는 사실로부터 고개를 돌려버리면 문제의 수렁에서 영영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난 장교로 군에 갔다. 남자들 모이면 군대 이야기 자주 하는데 나는 그 대화에 잘 끼지 않는다. 내 군생 활을 떠올리면 초라하고 비참했던 기억이 나를 압도한다.
나는 1997년 소위로 임관해서 약 4개월 간의 보병학교 과정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았다. 당시 나와 같은 나이인 동기 소대장과 한 중대로 배치받았다. 나의 동기는 1 소대장, 나는 2 소대장. 1 소대장은 체육과 출신으로 운동은 기본으로 잘했고 호탕한 성격에 금방 소대원들과 친해졌다. 그에 비해서 나는 운동과 담을 쌓고 살아오며 아무 생각 없이 군에 와 버린, 그냥 대책 없이 착하고 의롭기만 한 소위였다. 당시 30명의 소대원 중 12명이 병장이었는데 나는 그 풍경을 단박에 억압적이고 폭력적이며 무질서한 상황으로 규정했다. 나의 눈에는 내 소대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부조리와 반칙 편법 착취가 소대 안에서 횡행하고 있었다. 나는 사사건건 병장들의 관습을 반대했고 대립은 계속 격해졌다. 베짱이라도 두둑했으면 좋았겠으나 나는 중대장이 무서웠고 행보관님도 부담스러웠다. 나보다 중대 상황을 훨씬 훤하게 꿰고 있던 행정반 병사들에게도 주눅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나는 내 소대원들이 무서웠다. 나를 잡아먹을 듯 째려보기도 하고 알듯 모를듯한 비웃음을 계속 흘리던 그들이 무섭고 싫었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조직적인 따돌림이었다. 겁먹고 주눅 든 속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썼다. 도대체 아무것도 잘할 수 없던 소위 시절은 참담했다. 군 상담을 하는 친구에게 들어보니 초급 장교 자살도 큰 문제라 하던데, 내가 그 시절 자살하지 않고 무사히 전역한 것이 그저 다행스러울 뿐이다.
운동도 못 하고, 소대원들과의 사소한 갈등을 융통성 있게 처리하는 것도 미숙했으며, 부대 안팎의 행사와 훈련 정보를 미리 파악해서 그때그때 소대원들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지도 못했다. 그럴 필요도 못 느낄 만큼 둔했다. 전역을 두어 달 앞둔 말년 병장 하나가 보다 못해 나에게 말을 꺼냈다.
“솔직히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1 소대장님 보고 좀 배우지 말입니다.”
그의 말에 반박을 못 했다. 맞는 말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내가 옳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후임병들을 괴롭히기만 하는 저 닳고 닳은 병장의 이야기는 올바를 수 없었다. 그는 악한 편에 섰고 나는 선한 편에 섰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에 진리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두들겨 맞는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고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소위 시절을 보냈다. 그때 축구라도 열심히 연습해서 소대원들과 친해졌더라면, 새파랗게 젊은 사람 30명을 한 공간에 몰아넣고 사생활도 적절한 휴식도 없는 상태로는 착취와 억압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혜안이 있었더라면, 소대장으로 할 수 있는 일들과 깨끗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좀 더 일찍 구별했더라면…. 만약에 라는 말은 끝도 없이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얼마나 그 마음이 간절했으면 다시 군에 가서 새롭게 시도해 보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잘 사는 것이다. 자존심과 내가 옳다는 생각이 삶을 얼마나 꼬이게 만드는지를 다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