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으로 배워보는 심리학 - 2장: 맞더라도 상대의 주먹을 보라
가족의 희생양 (Family Scapegoat)
“우리 집은 민준이만 정신 차리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집이 좀 조용해진다 싶으면 이 녀석이 꼭 사고를 칩니다.”
민준이 아버지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의 잔근육은 그가 힘주어 이야기할 때마다 움찔거렸다. 예쁘장한 얼굴로 상담실 천장과 실내장식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는 누나는 다소 무심해 보였다. 민준이 옆에 바짝 붙어 앉은 어머니는 민준이와 상담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그래도 아이가 마음은 착해요’를 연발한다. 민준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상담자 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는다. 민준이네 가족과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상담실 공기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다른 아이들처럼 무난하게 잘 자라던 민준이가 중학교 2학년이 되더니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온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혼내보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했지만 민준이의 엇나가는 행동은 거침없었다. 게임 아이템을 산다고 엄마 카드에서 수십만 원을 한꺼번에 긁기 시작했다. 카드값은 혼내가며 수습할 수 있어 그나마 작은 규모의 사고에 속했다. 본인은 편의점에서 계산하기를 잊어버리고 그냥 나왔다고 했지만, 물건을 훔치는 일이 반복되자 절도라는 엄청난 죄목이 붙어 보호관찰을 받기도 했다. 술·담배와 게임을 실컷 하는 선에서 민준이의 학창 시절은 가족과 타협을 이루는 듯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불법 도박에 연루가 되어 집안이 또다시 크게 출렁거렸다. 도박 빚은 쌓여만 갔고 다 큰 아들을 가둬놓고 감시하기도 어려워 가정이 파탄 날 지경에 이르렀다.
겉으로 보기에 이 집의 문제는 명확해 보인다. 아버지 말씀대로 민준이 버릇만 고쳐서 돌려보내면 가족은 행복해질 것 같다. 그것이 가족이 상담을 찾은 이유다. 가족상담에서는 이런 경우 민준이를 IP (Identified Patient)라고 부른다. IP는 가족을 상담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가족들 사이에서는 IP가 가족의 문제로 지목된 사람이지만 상담자는 그 사람을 가족의 진짜 문제로 보지 않는다. 진짜 가족의 문제는 가족들 사이에, 그 관계 안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식당 자영업을 하는 아버지는 장시간 고된 노동에 늘 신경이 곤두서고 지쳐있지만, 변함없이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어머니는 틈틈이 식당을 도우면서 가정도 살뜰하게 챙기는 역시 모범주부다. 어려서부터 똑똑하고 야무졌던 누나는 장학금으로 대학을 나와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 가족과 친척들의 칭찬을 독차지하고 있다. 평소 민준이 보기를 벌레 보듯 했으나 결정적 순간엔 적금을 깨고 사고 수습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너그러운 누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누나도 모두 다 착실하게 생활하는데 도대체 민준이는 왜 자꾸 엇나가기만 할까?
아버지는 아들 하나 있는 것을 아내가 너무 감싸고돌아 버릇이 없다고 했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어려서부터 너무 엄하기만 해서 민준이 마음이 비뚤어졌다고 했다. 누나는 민준이는 어려서부터 하나뿐인 아들이고 막내라는 이유로 사고를 쳐도 부모님이 다 해결해 줘서 선을 모른다고 했다. 가족의 눈은 민준이의 일거수일투족에 온통 쏠려있었다. 언제 어디서 사고를 일으킬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정말 그럴까?
인간 상호작용은 때로 그 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민준이의 역할은 집안에서 문제아다. 그러나 민준이가 문제아 역할을 하는 동안 다른 가족들이 얻는 이익이 있다. 가족들이 이렇게 고통받는데 어떤 이익을 얻는단 말인가?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손실이 있을지 몰라도 심리적으로 얻는 반사이익이 있다.
아버지는 사업 말고는 다른 곳에 관심이 없는 일 중독자다. 처음에는 부부가 같이 식당을 했으나 민준이가 지속해서 사고를 일으키자 아버지는 아이들 교육과 집안 살림을 민준이 어머니에게 맡기고 식당 경영에서 빠지게 했다. 아버지는 더욱더 일에 집중할 핑계가 생기고 말았다. 매장이 하나이던 식당에서 2호점 3호점이 연이어 생기면서 아버지는 접어 두었던 사업가의 꿈을 꾸게 되었으며 아내 몰래 거액의 은행 대출까지 받았다. 민준이가 아내의 신경을 온통 빼앗은 덕분인지도 모른다. 부부관계는 점점 더 소원해지고 별다른 소통이 없었으나 민준이가 큰 사고를 일으키고 나면 아내가 무척 미안한 얼굴로 사고 수습을 의논해 왔다. 남편은 은근히 그 상황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내는 한 편 민준이 보살피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내세우며 남편에게 큰소리칠 수 있어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자기가 민준이를 잘 타일러 그나마 이 정도로 집안이 돌아간다고 굳게 믿고 있다. 갱년기 우울증도, 대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꿈도 민준이와 함께 날아가 버렸다. 나쁘지 않았다. 우울증의 고통도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아쉬움도 민준이의 사고 한 방이면 다 잊을 수 있었다.
민준의 누나는 사고뭉치 남동생 때문에 더욱 악착같이 공부했다. 덕분에 어려서는 받지 못했던 부모님의 인정과 칭찬을 독차지했다. 요즘은 그냥 가만히 있어도 부모님의 미더운 눈빛과 도움을 바라는 요청이 들린다. ‘쓰레기 같은 남동생’에 비하면 자신은 얼마나 우월한 존재인가. 우월함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주위의 선망과 인정을 확실히 하기 위해, 몇 년 되지 않은 직장생활을 통해 모은 돈으로 여섯 번에 걸친 성형 수술과 시술을 했다. 부모님은 크게 신경 쓰지 않으시는 것 같다.
민준이가 처한 상황을 다시 뒤집어보면 가족 구성원이 모두 다 촘촘하게 협력하고 도와가면서 민준이가 계속해서 사고를 칠 수 있도록 해 주는 꼴이 된다. 결정적으로 민준이는 가족들의 치부를 가려준다. 은행 대출의 시한폭탄을 막기 급급한 일 중독인 아버지, 민준이 걱정 말고는 실상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기력한 엄마, 오래전에 파탄 난 부부관계, 시간과 돈을 미용과 성형에만 투자하는 딸의 공허한 심리상태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민준이의 문제가 해결되면 집안이 평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부부 갈등, 가정경제 위기, 정체성위기 등등으로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다. 민준이가 가정이 유지되도록 필사의 노력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가족치료 이론에서 민준이를 희생양(scapegoat)이라고 한다. 가족 구성원의 모든 비난을 받으며 나머지 가족의 문제를 감추는 역할을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라는 시스템 안에서 각자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보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지 않으며 보지 않은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되어있다.
‘누구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라고 말한다면 당신도 그런 시스템 안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 가정이든 직장이든 학교든 간에 상관없다. 그러한 태도와 마음가짐은 당신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달콤한 우월감과 위안을 대신 얻는다. 문제는 나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때문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