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불볕 언덕을 오를 때면나는 순간이동을 바랐다. 저 위에서 내려오는 사람과 내 위치가 바뀐다면 서로 좋을 텐데 말이야. 지금도 순간이동은 불가능한 탓에나는 나만의 방식을 찾았다.
나는 낯선 도시를 갈 때면그 도시에서 함께 할 앨범을고른다. 그곳에서 틈날 때마다 앨범을 들으며 앨범사이사이에풍경을 접어 둔다. 앨범 단위로 찾지 못했다면 곡이라도 선정한다.이렇게 해두면 나중에앨범을 들을 때 풍경과 공기를 포함한 도시분위기가 재현된다.도시를 잘 알면서 음악 취향도 맞는 사람에게 추천받는 방법이 가장 확실하다.
오전처럼 하늘이 꾸물할 때면 우효의 앨범 소녀감성(2014)을 들으며 고이 접혀있던 3박 4일의 오키나와를 꺼내본다. 누구한테 추천받았는지 인터넷에서 검색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앨범명에서 거리감이 느껴짐에도 선정했다는 것은 흐린 오키나와와 잘 어울렸다는 의미다.
몇 년 전 불탄 슈리성은 이제 소녀감성 안에만 있다.
전주, 부산, 통영, 양양 등 국내 도시에도나만의 음악이 있지만, 자주 오기 힘든 해외 도시에 갈수록 이 작업이 의미 있고 시간이 갈수록 소중해진다. 그래서 해외 도시를 갈 때는 앨범을 신중하게 고르고, 도착해서 현지 날씨까지 감안해 최종 선택한다. 혼자 떠나면 항공권과 숙소만 예약할 정도로 여행계획을 세우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처음 접하는 앨범일수록 재현 효과가 커진다.이미지가 없던 도시가 앨범과세트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최근,해외에 도착 한 뒤 새로운 향수를 뿌리며 도시를 기억한다는 글을 보았다. 이 방법도 뇌는 착각으로 작동한다는 원리를 이용한다.
오후에는 예보대로 장마가 시작됐다. 나에게 장마는 하루키 문학이다. 장마를 대비해서 회사 도서관에 『태엽 감는 새』를 주문했지만 비치되지 않아,아쉬움과 함께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빌려왔다. 대학 마지막 방학 장마에 읽었던 상실의 시대의 꿉꿉함이 재현된다.『스푸트니크의 연인』은『1q84』나 『기사단장 죽이기』 보다 『상실의 시대』에 가깝다고 느낀다. 헌책의 눅눅함이 오히려 좋다. 에어컨이 아닌 선풍기와 읽는다.
에그타르트와 커피로 저녁을 대신할 요량이었다. 느긋하게읽던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덮고, 갑자기요리를 했다. 이번에 남자 주인공 역시 요리를 즐겨하기 때문이다. 하루키 작품 속 남자 주인공들은 맥주를 좋아하고 요리를 잘하며 목적 없는 독서를 한다. 홍염살도 있음이틀림없다. 무튼흰 살 생선 요리를 포함해 많은 요소들이 익숙하기 때문에 장마가 오면하루키를 찾게 된다. 간단히 만들어먹은 알리오 올리오도 여전했다. 오키나와와 하루키 덕분에 익숙한 주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