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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Jul 20. 2023

이곳이 명당이여

봄날의 고양이


나는 고양이가 무섭다. 어른이 되어서 조금 나아졌지만 두려움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동물이나 곤충에 대한 애착이나 두려움은 어릴 때 주로 형성되는데, 어린 시절 내 주변에는 고양이를 요물이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았다. 키우던 고양이를 버리면 백만 리를 쫓아와 주인에게 복수한다든지, 고양이한테 잘못했다가 응징을 피하지 못했다는 등의 옛날이야기를 듣곤 했다.


반면 강아지는 좋아했다. 개는 고양이보다 좀 더 충성스러운 존재라고 들었고, 어릴 적 친척분이 주신 강아지를 2년 정도 키우기도 해서 강아지는 친숙한 존재가 되었다. 큰 개는 아직도 무섭지만.


고양이도 좋아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움을 극복하기도 전에, 언니, 오빠, 나 이렇게 한 마리씩 키우던 병아리 세 마리를 이웃집 고양이가 모조리 물어 죽이는 바람에, 좋아지기는커녕 고양이에 대한 트라우마는 점점 더 커졌다. 마당에는 죽임을 당한 병아리들의 선명한 핏자국이 남아있었고, 두 마리는 이미 먹어버렸는지 흔적을 찾지 못했다. 한 마리는 우리가 보지 못하게, 엄마가 아침 일찍 치워 주셨다. 우리 삼 형제가 아끼던 병아리를 무참히 죽인 고양이도 미웠지만, 그 녀석을 아무 데나 돌아다니게 한 집주인은 더 원망스러웠다.


세월이 지나 나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 발 딛는 곳이 달라지면 부정적인 기억도 다 씻어낼 수 있겠지 싶었는데 그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렌트 아파트에 살 때는 고양이와 마주칠 일이 별로 없었다. 미국 아파트는 애완동물 들이는 절차가 까다로운 데다, 고양이는 대부분 실내에서 키우니까 말이다. 고양이를 다시 만나게 된 건 타운하우스로 이사 오면서부터였다. 주로 아침, 점심시간에 울타리를 타고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를 종종 마주쳤다. 냥이 주인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고양이를 볼 때마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이사 온 다음 해 봄엔 새집을 주문해 처마 밑 대들보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해놓으면 새가 찾아와 둥지를 틀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고맙게도 작은 참새?! 부부가 찾아와 열심히 나뭇가지를 주워 새집에 나르기 시작했다. 새는 아무 데나 둥지를 틀지 않는다고, 둥지를 틀면 그 집 기운이 좋아서 그렇다는 얘기를 듣고 왠지 기분이 한껏 들떴다.


© abbey2, 출처 Unsplash


그러던 어느 날, 마당에 큰 낙엽이 떨어져 있었다. 낙엽이니까 바람에 날아가겠지 싶었는데, 그다음 날에도 그것은 ‘고정’되어 있었다. 저게 뭔가 싶어 밖에 나가봤더니 낙엽이 아니라 새 한 마리가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둥지를 튼 그 참새 부부 중 한 마리가 분명했다.


죽은 새 주변으로 개미가 바글바글 몰려 있었다. 허망하고 기가 막혀 그 새를 한참 쳐다보고 있었는데 기척이 느껴졌다. 고양이가 나무 담장에 올라서서 죽은 새와 나를 번갈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순간 멈칫 뒤로 물러섰다.


우리 집에 둥지를 튼 작고 예쁜 새를 무참히 죽이다니... "네가 죽였어? 저리 가!” 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야옹거리며 반대편으로 도망간다. 여기선 너랑 좀 친해지고 싶었는데, 너랑은 도저히 안 되겠다, 응?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언니와 나와는 달리, 조카는 냥이를 끔찍하게 좋아한다. 조카에게는 고양이에 대한 아무런 편견이 없다. 작년 겨울 한국에 갔을 때, 녀석은 냥이 영상에 푹 빠져있었다. 냥이 밥 주는 영상, 모래에서 맛동산(고양이 배변) 골라내는 영상, 냥이랑 놀아주는 영상…. 죄다 냥이 유튜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고양이가 별로였다. 하지만 나는 조카의 취향이라면 한 번 더 돌아보는 조카바보이모가 아니던가. 녀석은 왜 냥이가 좋은 걸까 궁금해졌다.


“땡땡아, 땡땡이는 왜 냥이가 좋아?”

“음… 입이 3자 모양으로 생긴 게 귀여워.”


조카 눈엔 그게 귀여운 거였구나! 하긴 동화책 고양이 그림을 보면 입 모양이 다 3자로 그려져 있으니까 말 다했다. 조카가 아니었으면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을 고양이에게 그제야 조금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나는 미국에 돌아왔고 마침 옆집에도 새로운 이웃이 이사 왔다. 갓난아기가 있고, 고급스러운 회색 털의 고양이(‘그레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한 마리를 키우는 동유럽계 부부였다.


이웃집 냥이 '그레이' - 왜 찍냐옹?!


우리 집 나무 담장과 타운하우스에서 가꾸는 정원 사이에는 그늘진 작은 공간이 있다. 아침에 커피를 내리고 있으면 어느덧 이웃집 냥이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와 그늘에 자리를 잡고 하늘을 쳐다본다. 오후엔 일광욕하며 곤히 낮잠을 자기도 한다. 그곳이 명당인겨? ㅎㅎ 지난봄 이웃집 고영희 여사는 자기 집보다 우리 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어떨 땐 우당탕탕 소리가 나 마루에 내려가 보면, 그레이와 다른 고양이가 털 날리며 맹렬히 싸우고 있다. 나의 3평 마당은 어느새 동물의 왕국이 된다. 그들은 영역 다툼을 하는 것일까, 사랑싸움을 하는 걸까? 알 수 없는 고양이 마음이다.


'그레이'와 투닥거리는 이름 모를 이웃 냥이 - 이곳이 명당이여~


지난 글에서 ‘벌집 퇴치’ 얘기를 했지만, 단독 주택에서 절대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은 벌뿐이 아니다. 쥐, 터마이트(목조 건물 갉아먹는 흰개미), 바퀴벌레, 집 지네, 초파리가 그것이다. 일 년에 한두 번, 마당에서 쥐를 본 적이 있다. 혹시 우리 집에 쥐가 사는 게 아닌가 걱정도 했지만, 쥐구멍을 막은 후엔 잠잠하다.


평소 나무 담장만 타고 사뿐사뿐 돌아다니는 그레이가 우리 집 마당에 내려온 적이 있다. 뭔가를 쫓는듯했다. 한참을 푸닥거리길래 나가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생쥐 한 마리를 쫓고 있었다. 생쥐가 흙과 비료 포대기 뒤에 숨자, 그레이는 ‘장애물을 좀 치워줘야 저 쥐를 잡을 수 있다’고 야옹거리며 내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우리 집에 흘러들어 온 쥐까지 쫓아주는 네가 어찌나 고맙던지.


딱 이런 눈빛이었다


사람도 그렇지만, 동물도 자주 봐야 정이 드는가 보다. 고양이가 내게 딱 그랬다. 무루 작가는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에서 고양이가 그의 삶에 처음으로 들어온 순간에 대해 얘기한다.


“2013년 봄, 나에게 고양이가 왔다. [중략] 그렇게 한 1년 고양이와 정신없이 인생이 흘러가는 동안 집 밖에서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세상 모든 곳에서 고양이가 나타난 것이다. 어디에나 고양이가 있었다. 주차장에도, 골목에도, 화단에도, 낯선 도시의 거리에서도 고양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내 인생 어딘가에서 새로 문이 열려 고양이들이 쏟아져 들어온 것 같았다.”

“고양이 따위 알게 뭐냐고 소리치는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아직 고양이의 문이 열리지 않았던 나를 생각한다. 나에게 그랬듯 그들에게도 어느 날 문득 문이 열리는 날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내가 그 문을 열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을 열어주는 사람에게는 무엇보다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하다.”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무루 지음, p.139-140



나도 그랬다. 조카의 냥이 사랑으로 내게 '고양이라는 이름의 문'이 열린 이후, 내 삶의 반경에도 고양이가 자주 출현하고 있다. 옆집 그레이도, 그와 가끔 털 날리게 투닥대는 이름 모를 이웃 고양이도, 가끔 현관문 앞에서 야옹거리는 새끼 고양이도... 아직 반려묘를 키울 마음은 없으나, 우리 집 울타리에 놀러 오는 냥이를 보며 어릴 적 고양이 트라우마도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느낌이다.




편견이라는 게 이리도 무섭다. 여태껏 고양이라는 포근하고 새침하며 사랑스러운 세상이 있다는 걸 모르고 살았으니까. 8살 조카 덕분에, 아늑한 3평짜리 마당 덕분에 내게도 ‘고양이라는 이름의 문’이 열렸다.


땡땡아, 나를 고양이의 세계로 안내해 줘서 고마워!

그레이, 앞으로도 그늘 명당에 자주 놀러 와! 가끔 쥐도 잡아주고 :)


올겨울 조카한테 보여줘야지 © 지나쥬르 via Midjour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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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 보너스 영상 :)

이웃집 냥이 '그레이' - 살짝 미끄러졌지만 시크하게 사뿐사뿐
고양이 쉼터 - 이곳이 명당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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