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주 May 12. 2022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우리 가족의 잠자리 전쟁

매일 밤, 전쟁이 시작된다.

남편과 두 아이가 서로 나와 함께 자려고 싸움을 벌인다. 

열세 살 첫째는 엄마가 동생과 둘이서 자는 것이 불만이다. 열 살 둘째는 언니가 나 만할 때는 엄마와 잤으니 본인도 그래야 한단다. 남편은 어느 순간 혼자 자는 것이 외롭다며 수면 중 돌연사가 두렵다고도 한다.

나는 결국 아이들과 함께 잠이 든다. 십 대가 되었건만, 두 아이는 엄마와 같은 잠자리에 드는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살을 비벼댄다. 둘이 모두 잠들 때까지 나는 꼼짝없이 누워 기다려야 한다.

넓은 방에서 혼자 자는 날이 많아진 남편이 심술을 부린다. 자다가 깨서 헛것을 보았다며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 고심 끝에 네 식구가 함께 자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안방에 매트리스 두 개를 놓으니 널찍해서 굴러다니며 자도 될 것 같아 만족스럽다. 이제는 평화가 찾아올 거라 기대했는데 이런, 또다시 전쟁이다. 이번에는 누가 엄마 옆에 눕고 아빠와 멀리 떨어질 것인지를 두고 싸운다. 늘 각자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매일 밤이 도돌이표다. 혼자 자고도 남을 나이의 아이들이 밤마다 아기가 되어 재워달라 하고, 양팔을 꼭 잡고 꼼짝 못 하게 할 때면 나 자신이 처량한 기분이 들었다. 하릴없이 누워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렇게 한참 누워있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가족회의를 열어 각자 혼자 자기 위한 시기를 정해 보기도 하고, 멋진 잠자리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매일 밤 잠자리 전쟁은 계속되었다. 아무도 내 의사는 묻지 않았고 각자의 주장대로 나를 자신의 잠자리로 데려갈 궁리만 했다. 


영원할 것 같던 이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허무하게 끝났다. 긴 코로나 바이러스로 지쳐있던 2020년의 크리스마스 아침, 둘째는 즐겁게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받고, 한 달 전부터 계획했던 이벤트를 하나씩 해 나가다 사소한 이유로 기분이 상했다. 결국 남편과 아이는 무엇인지 기억나지도 않는 이유로 신경전을 시작했다. 이 다툼의 끝에는 또 잠자리 문제가 거론되었다. 둘째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인디언 텐트를 어디에 설치할지를 두고 언쟁을 했고, 기분이 상한 남편이 둘째에게 앞으로 그 안에서 혼자 자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아이는 최악의 크리스마스라며 울기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아이들의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그들의 주문에 맞춰 요리를 하며 분주하던 나는 기분이 상해버렸다. 갑자기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온 식구를 거실로 불러 모아 일장연설을 해댔다. 그동안 전쟁을 치르며 쌓였던 분노를 폭발시켰다. 더 이상은 가족들에게 맞춰줄 수 없다고, 나는 이제 내가 자고 싶은 곳에서 자고 싶을 때 잘 테니 셋이 같이 자든, 혼자 자든 알아서들 하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나의 선언에 다들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당황한 식구들의 표정을 보니 순간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이렇게 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오후 내내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내 눈치만 보던 아이들은 결국 함께 자기 위한 둘만의 협상을 시작했다. 난 일부러 잠자리가 불편한 서재에 잠자리를 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몇 년 간 이어온 전쟁을 하루 만에 끝냈다.

이후로도 며칠 동안 아이들이 혹여 다시 재워 달라고 할까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다. 예상과는 달리 아이들은 둘이 누워 라디오를 듣기도 하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었다. 가끔 아이들이 잠든 뒤 안방으로 옮겨와 자고 있으면 새벽에 나를 찾던 아이들이 아침이 될 때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는 모습을 보니 안도감뿐 아니라 서운함과 허무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쉽게 정리될 일이었는데 도대체 왜 몇 년을 밤마다 그 난리를 겪었나, 사실은 내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들이 스쳐갔다. 


잠자리를 독립하고 나니 아이들은 부쩍 커버렸다. 이제는 중학생이 된 첫째는 말할 것도 없고, 사춘기가 막 시작된 둘째도 나 없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진다. 아이들이 독립해서 자유로워지는 날을 그토록 바랐건만, 막상 그들이 내 곁을 떠날 준비를 생각보다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어쩌면 나는, 그동안의 전쟁을 즐기고 있었나 보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매일을 흘러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