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을 위한 변명
가끔, 오래전에 썼던 블로그를 뒤적인다.
아이들이 나에게 선물한 소중한 추억에 위로를 받고, 힘들고 속상해 끄적인 메모들을 보며 현재의 평온함에 감사한다. 그러다 꽤 오래전, 당시 열중했던 SNS인 트위터에서의 일에 대한 감상을 발견했다. 내가 구독하던 유명인이 식당에서 시끄러운 아이를 방치한 엄마에 대해 비난하는 글을 보고 상처를 받았다는 내용이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에게 공공장소에서 규범을 잘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으며 자랐다. 특히 외식할 때 얌전하게 식사를 마치는 것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그 기준은 내재화되어, 식당이나 대중교통과 같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공간에서 큰 소리를 내면 교양이 없는 거라 생각했다.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즉시 제지하지 않는다면 그 부모는 예의 없고 무식한 사람이라 단정 지었다.
아직 미혼이던 어느 날, 또래에 비해 일찍 결혼한 동네 언니와 저녁을 함께 했다. 언니는 네 살 정도의 아들을 데리고 나왔다. 당연하게도 꼬마 신사는 식사에 집중하지 못한 채 부산스러웠고 급기야 식당 안을 자유롭게 활보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이를 한 번도 붙잡지 않았다. 나는 그 상황이 매우 불편했다. 언니는 아이를 쫓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어차피 안 될 일인데 아이나 나나 기분 상하는 것보다는 그냥 두는 게 서로를 위해 좋아’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건 비겁한 변명이라 생각했다.
큰 아이를 낳아 키우는 동안에도 내 생각은 같았다. 오히려 나와는 달리 옆에서 다른 사람의 식사까지 어수선하게 만드는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다른 부모들이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다며 비난했다. 그것이 나의 오만이었음은 둘째를 낳고 나서 깨달았다.
첫째는 흔히 말하는 손이 거의 가지 않는 아이였다. 백일이 지나 외출이 편해진 후 어디를 데리고 나가도 큰 소리를 낸 적이 없었다. 말 귀를 알아듣게 되면서는 어른들이 정한 규칙 안에서 행동하며 크게 어긋남이 없었다.
둘째는 모든 면에서 달랐다. 뱃속에서부터 격렬한 아이였다. 임신 8개월이 지나면서는 태동이 있을 때마다 뱃가죽이 찢어질 듯 아파서 태동이 멈췄으면 절로 바라게 될 만큼 괴로울 정도였으니까. 백일 즈음부터는 본색을 드러냈다. 집에서나 밖에서나 전담인력 없이는 함께 식사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장난감을 쥐어 줘도 1분 이상 가지 않았고, 전용 의자를 챙겨가 앉혀 놓아도 어떻게든 탈출하려고 발버둥 치는 것이 기본이었다.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고성을 질렀고, 기분이 나쁘면 나쁜 대로 울음으로 어른들의 혼을 쏙 빼놓았다.
두 아이가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나를 혼란에 빠트리기 충분했다. 얌전하고 말 잘 듣던 큰 아이마저 동생에게 자극을 받아서인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본능에 충실한 아이가 되었다. 어른들이 말리면 동생은 되고 본인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상황들을 납득하지 못하고 불만을 표했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서로가 주고받는 에너지는 커졌고, 어느 순간 소란스러운 아이들을 바라보며 예전에 언니가 했던 변명을 나 스스로에게 하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자랑스럽게 여겼던 교양과 품위는 착각이었다. 나는 그저 뽑기를 잘 한 운 좋은 부모였던 것이다.
두 아이를 키우게 된 후부터 난 다른 사람의 상황을 쉽게 판단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는 불편하고 옳지 않아 보여도 그렇게 선택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람만의 이유가 있을 테니까.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는 알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사정들이 있는 거니까.
많이 속상했던 그날의 기억을 기록해둔 것이 벌써 8년 전이다. 우리 아이들은 십 대가 되어 외식을 할 때 피해야 할 음식도 없고, 옆 테이블을 불쾌하게 할 만큼 시끄럽지도 않다. 하지만 이젠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아가들의 산만한 행동과 울음소리가 짜증 나지 않는다. 그저 아가들과 함께 앉아있는 부모들의 불편한 마음이 짐작되어 가능하다면 잠시라도 그 아이들을 대신 봐주고 싶을 뿐이다. 나도 그런 날들을 겪어 보았으니까. 조금이라도 알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