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한국 사람이 필리핀 사람보다 영어 잘해요
외항선을 타는 해기사는 외국 곳곳으로 나가기 때문에 세계 공용어로 쓰이는 영어는 필수적이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마다 선배님들은 영어 공부의 중요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강조하고 졸업하기 위해선 일정 토익 점수를 넘겨야 한다.
특히 항해사는 외국항 기항 시 C.I.Q (Custom, Immigration, Quarantine)이라고 불리는 입항 수속 3종 세트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각국의 서류를 읽어내는 능력이나 C.I.Q 절차를 처리하는데 필요한 영어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필요하다. 또한 상대선과의 VHF (무전) 또한 영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적절한 영어 의사표현을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영어 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영어는 공부하는 것이 아닌 '언어'여야 한다는 생각이 변함이 없는데 이러한 생각은 내가 영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식 영어 교육 방법을 너무나 싫어한 탓에 정형화된 문법 패턴을 익히는 것 (예를 들면 5 형식)을 의식적으로 거부했고 다만 영어로 된 자료에 대해 겁먹지 않고 소비하려 노력했다.
때문에, 영어에 대한 자신감은 어느 정도 있었고 시험을 봐도 결과가 나쁘지 않았었다. 하지만 진짜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아는 단어가 많거나 문법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계기가 있다.
대학 졸업식을 하고 기초 군사훈련을 받기 전 친구들과 베트남 여행을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과 함께 어울릴 수 있었다. 그중 우리와 나이가 같았던 독일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고 마지막으로 발마사지를 받고 각자 숙소에 돌아가기로 했다. 마사지 호객행위를 하던 사람에게 가격이 얼마인지 확인하고 마사지를 받았으나 마사지를 다 받고 나니 갑자기 말을 바꾸며 가격을 올려치기 하는 것이 아닌가. 한화로 하면 몇 천 원 안 되는 가격이기에 나와 내 친구들은 따질 생각도 못하고 그냥 "그거 몇 푼 된다고, 그냥 주고 말자." 하고 넘어가려 했지만 그 독일 친구는 절대 약속한 금액 이외에는 줄 수 없다며 따지고 들었고 그러자 오히려 그쪽에서 꼬리를 내리고 약속한 금액만 받아갔다.
그때 깨달은 점은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영어를 잘 활용할 줄 아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 독일 친구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에 발음도 투박했고 문법적 오류도 많았었다. 하지만 자신 있게 자기가 할 말을 했고 불합리한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갔다.
그 이후로 나는 승선을 하면서도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틀리더라도 비교적 자신 있게 영어를 구사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다. 때로는 오히려 언쟁을 즐길 정도로 불합리한 것에 대해서 정당하게 말할 수 있었으며 그럴 때마다 적절한 합의점을 찾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가 겪어보았던 동료 해기사들은 영어에 대해 스스로 부족함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고 자연스럽게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봐도 불합리적인 것을 요구당할 때 한국어를 할 때처럼 따지는 것을 영어로 하지 못해서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식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즉 영어가 안돼서 호구가 되는 것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럴 때면 나는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영어를 배우고 또 대다수 사교육의 경험도 있으며 영어 시험을 준비하며 외운 영어 단어수가 10,000개는 될 텐데 머릿속에는 다 있지만 사용할 줄 모르고 "나는 영어 듣기나 읽기는 잘하지만 말하는 것이 잘 안돼"라고 스스로 프레임을 씌워버린다. 그러면 영어를 쓸 기회는 점점 더 적어진다.
이렇게 점점 더 의기소침해지다 보니 같이 승선을 하는 필리핀 부원들보다도 본인의 영어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절대 우리 한국인 선원들이 그들에 비해 영어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이나 관심도는 필리핀에 비해 월등히 높은 것이 사실이다. 구사하는 단어의 수준이나 문법적 지식은 이미 그들보다 훨씬 수준 높다. 하지만 단순히 그들에 비해 영어에 노출되는 빈도가 적고 영어를 직접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는 기회가 적을 뿐이다.
해기사로서 영어의 실력은 중요하다. 본인의 가치를 가장 직접적으로 올릴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다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스스로 영어를 못한다고 생각했던 당신이 어쩌면 이미 영어를 잘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영어는 언어 중 하나일 뿐이다. 영어 단어를 몰라도 좋다. 손짓 발짓으로 의사를 전달하는 것도 언어 중 하나이다. 영어에 기죽어서 갑질 당하거나 거기서 받은 스트레스를 남한테 풀지 말고 적극적으로 본인의 의사를 표현하는 습관부터 기르는 것이 좋다.
거기서 답답함을 느낀다면 거기서 영어를 쓰는 연습을 해야 할 동기가 생기는 것이고 실력 발전의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