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력과 인내심에 대하여
(일반적인 화물선) 배를 탈 때는 보통 6개월 계약을 한다. 보통 승선 6개월 전 후로 하선을 하지만 교대자가 부족하거나 상황이 꼬이게 되면 원치 않아도 계약을 연장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
나 또한 가장 길게 승선한 기간이 9개월인데 이 시기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한창 창궐할 때라 외국항 기항 시 상륙은 꿈도 못 꾼다. 그렇기 때문에 말 그대로 “땅 한번 못 밟고 배를 탔다.”라고 볼 수 있다.
물론 9개월 내내 항해만 한 것은 아니지만 9개월이 넘도록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만 본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은 이걸 상상하기조차 힘들어한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장기 승선을 하고 일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배 위에서만 산 사람도 있다.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어떻게 인내할 수 있었을까?"
사실 나도 ‘마의 3개월’이라고 불리는 기간까지는 크게 힘들지 않게 잘 탔다. 첫 3개월은 새로 승선한 배에 대한 적응과 담당 업무를 나한테 최적화시키는 기간이라서 바쁘게 일하다 보면 정신없이 지나간다. 그러나 3개월이 넘어갈 때쯤 되면 이미 환경과 업무에 적응을 마친 상태이기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매너리즘 mannerism"
: 항상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취함으로써 신선미와 독창성을 잃는 일.
그 이후가 되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미치도록 지겨워진다. 밖을 내다봐도 보이는 것은 바다뿐이요. 오래된 친구도 보고 싶은 가족들도 볼 수 없다. 그러니 지겨워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인 환경이다. 그럼에도 계약 기간은 몇 개월이나 남았다.
사람마다 이 지겨움을 이겨내는 본인만의 트릭들이 있겠지만 나는 승선하는 기간 동안 실연을 겪기도 하고 사무치는 외로움과 고독감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9개월을 잘 버틸 수 있었다.
나는 4개월쯤 됐을 시기부터 “조금만 더 타면 내리겠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보겠다. 만약 배가 유럽 마지막 항구인 로테르담을 출항했다 하면 “수에즈 운하만 통과하면 끝이다.”라고 말한다. 보통 유럽에서 수에즈 운하 통과까지 열흘 정도 걸리기 때문에 ‘열흘만 참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 모항인 부산까지 훨씬 더 많이 가야 하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수에즈 운하만 통과하면 크게 신경 쓰일 일이 줄어들기 때문에 나 나름의 정신 승리(?)를 하는 것이다. 실제로 내가 버텨야 할 기간은 몇 개월이지만 가시적인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심적인 부담감을 줄인다. 체크 포인트를 바꿔가며 "10일만 더 참자"를 계속 반복하는 것이 "3개월만 더 참자"보다 훨씬 더 부담감이 적다.
마치 마라톤을 완주하기 위한 달리기 연습 같다.
달리기를 시작한 누구나 처음부터 42.195km를 완주할 수 없을 것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도 오래 달리기부터 연습할 때 눈에 보이는 지점까지 뛰어가는 것을 목표로 달려가고 또다시 목표 지점을 갱신하며 체력을 늘려가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아니면 어릴 때 부모님 따라 등산할 때 힘들어서 정상까지 얼마 남았냐고 물어보면 엄마가 꼭 “다 왔다 다 왔다” 얘기하는 것 같다. 내가 어른이 되고 등산을 해보니 사실은 이제 막 절반만 지났는데도 다 왔다고 말을 하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90%까지 끌고 가면 나머지 10%부터는 내가 스스로 산 정상을 볼 수 있어서 다 왔다는 말을 안 들어도 계속 갈 수 있는 정신력이 생기는 것 같다.
단순히 9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배를 탄 것뿐만 아니라 나는 그 과정에서 “버티는 법”을 스스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