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승원 Sep 15. 2023

곰곰히 생각해보니 내가 조금 불쌍하길레..

Fuck you!!!

어렸을 적 꿈으로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혹은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장구벌레가 모기가 되듯 나 또한 커서 예술가가 될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하는 편이었다.


어렸을 적 내가 알게 된 화가가 되는 방법은 매우 기이했다.


일단 수능을 잘 치러야 했으며, 연필과 수채 물감만으로 석고상을 똑같이 따라 그려야 했다. 그것이 도대체 예술적 재능의 어느 영역에서 도움이 되는 것인지 나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가끔 어른들에게 매우 머리가 나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고 또 아주 가끔은 머리가 비상한 아이인데 안타깝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나는 공부를 못 했다. 심지어 안 했다.

나는 내가 머리가 멍청해서 공부를 못 하는 것인지

머리가 비상함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친구라 그런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집안 어른들에게 골칫덩이까진 아니었지만

조금은 유별난 아이 취급을 당했다.

학교에서 왕따까지는 아니었지만 친구들 사이에서

묘하게 소외당하는 아이였다.


스무 살 무렵의 나는 발 붙일 곳과 마음 기댈 곳이 없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화가 나있었다.

수능과 미술 실기 시험이라는 것은 내게 있어 꼰대들의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고 내가 꿈꾸던 가능성은 전부 그들의 차지였다.

나는 장구벌레가 자연스럽게 모기가 되듯 내가 자라면 자연스레 예술가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그저 망상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요하며 살아갔다.


앞으로 봐도, 뒤로 봐도, 옆으로 봐도 예술가가 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주변 친구들이 한예종과 홍대에 척척 붙어대며 성공이라 불리는 열차에 탑승해서 안도감을 내쉬며 행복해하는 듯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진심으로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열등감으로 범벅이 되고 먹칠이 된 채

서서히 패배감에 잠식되어 갔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강제로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했다.


그 무렵 내 재능을 높이 샀던 한 누나는 술을 마실 때마다 내가 이런 말을 건넸다.

“너가 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너야말로 네 꿈을 펼칠 수 있었을 텐데.. 내가 다 원망스럽다. “라고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화가 솟구쳤지만 어린 마음에 왠지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서 해주는 말 같아 반박하지도 못하고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 나이 29살에 나는 영상일이란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싫어하는 영상을 만들수록, 타인의 기준에 맞춘 영상을 만들어 낼수록 나는 더 인정을 받았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뭐 처음에는 나는 그 기분도 나쁘지 않았다.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그 일들은 정말이지 철저하게 씻어내 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나도 남들처럼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39살에 나는 영화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런 궤적을 그리며 살아온 내가 조금 불쌍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늦게라도 모기가 되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졸지에 39살의 신인 독립영화감독이 되고야 말았다.

그것은 나를 다시 불안하게 만들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씩 가난해지고 있으며 미래는 다시금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물론 딱히 인정받고 멋져 보이는 타이틀을 달고 그럴싸한 자리에 앉아있고 싶어서 시작한 일은 당연히 아니었기에 이또한 받아들이기로 마음 먹었다.

난 이제 39살이 되었고 19살, 29살 때처럼 타인의 평가가 날 뿌리부터 흔들어 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라도 영화를 한다. 참 다행인 일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