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이 동양을 문명적으로 앞설 수 밖에 없는 이유
소크라테스를 읽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면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 이야기-향연, 소크라테스의 변명 등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한 20여년 전에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에는 아무런 감흥도 없었고 배움도 없었다.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냥저냥한 책이었다. 그 후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책을 읽은 적은 없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에 대해 알고 있는건 그냥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 ‘악법도 법이다’, 계속 질문을 하면서 상대방의 무지를 들어나게 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소크라테스가 사회 혼란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죽었다는 등의 이야기들이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에 대해 큰 관심은 없었지만, 플라톤 전집이 나온걸 알고 책을 구했고, 어쨌든 유명한 사람이고 유명한 책이니 이걸 한번 읽어보고자 해서 읽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 대화법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 소크라테스의 질문과 상대의 대답 등을 계속 따라가다보니 정말 놀라왔다. 충격을 받았다. 서양 사상, 서양 학문의 진수, 그리고 동양 사상, 동양 학문과의 차이점이 확실히 다가왔다. 근대 이후, 서양이 동양을 앞서왔다. 현재도 서양 문명이 동양을 지배한다. 동양에서는 동양 문화도 우수하다고 주장한다. 공자, 노자의 심오한 사상을 이야기하고, 색즉시공 공즉시색 등 현대 과학이 이제야 발견한 것을 동양 고전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미 지적하고 있었다며 동양 사상의 우수성을 주장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플라톤을 읽다보니, 동양 사상은 서양 사상에 비교가 안된다. 아니, 사상 자체는 똑같이 우수할 수 있겠다. 하지만 최소한 현대 문명이 성립하는데는 소크라테스-플라톤 사상이 절대적이다. 현대 기술문명은 소크라테스-플라톤 사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다. 공자-석가의 사상으로 현대 기술문명이 만들어지는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공자 사상과 소크라테스 사상은 어떻게 다를까. 논어의 유명한 어구,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 불역낙호(不亦樂乎)’ -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를 보자. 공자가 이 말을 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아 뜻이 참 좋다’ ‘그렇지.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좋지’ ‘통찰력이 있다’ ‘옳은 말이지’ 등등의 반응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비판은 없다. 공자는 훌륭하고 옳은 말을 하고 삶의 지혜를 주고 있다. 여기에 딴지를 걸면 소인배가 된다. 이 말에 반박하면 사문난적 취급을 받고 잡혀갈 수 있다. 감히 공자가 한 말에 누가 뭐라 하겠나.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는 진리인 것이고, 제대로 된 사람이면 이 명제를 반박할 수 없다. 실제 공자가 죽은 후 유명한 유학자가 굉장히 많았지만, 이런 공자의 명제에 대놓고 반박한 사람은 없었다. 이런 옳고 통찰력 있는 말들을 모아놓은 것이 동양의 고전이다. 동양 고전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어떨까. 누가 소크라테스에게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럼 소크라테스는 바로 질문을 시작한다.
‘친구는 어떤 사람이 친구인가? 얼마나 오래 만난 사이라야 친구라고 말할 수 있나? 상대방은 나를 친구로 생각하지만, 나는 상대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을때는 어떻게 되나?’
‘멀리서 찾아온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먼 건가? 30분 거리? 1시간 거리? 하루 거리? 일주일 동안 걸어서 왔을 때?’
‘친구가 찾아오면 즐겁다고 했는데, 찾아온 용건이 돈을 빌리러 온 것이라면 그때도 즐거울까? 멀리서 친구가 찾아와 한 달 넘게 그냥 눌러 앉으면서 빈대붙어 먹을 때도 즐거울까? 나는 좋아하는 친구이지만, 가족들이 그 친구를 좋아하지 않을 때는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소크라테스는 그 하나하나를 모두 다 따진다. 그리고 마지막 결론을 내린다.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하나하나 세부 사항을 따져나가면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이 한계가 있다는 것, 진실이 아니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그 다음이다. 그러면 어떤게 옳은 걸까? 이와 관련해서 진실이라고 할만한 게 무얼까?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나는 모르겠다’
논어, 맹자 같은 동양의 고전은 진실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논어에서 나온 말이 진실이니, 그와 상충되는 말은 진실이 아니다. 동양 고전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서양 고전에서는 무엇이 옳은지 모른다. 다만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진실과 차이가 있는지, 또 진실을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러다보니 소크라테스에게는 절대적인 규범이 없다. ‘반드시 이래야 한다’라는게 없다.
이게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어떻게 연결이 될까? 동양 사회는 절대적 권위를 가진 사람이 한마디 하면 그 말을 따른다. 그 말에 의심을 품어서는 안되고, 지켜야 하는 규범이 된다. 소크라테스는 아니다. 현재는 항상 문제가 있다. 어떤 점이 문제인지를 밝혀내고 그걸 보완하고 수정하는 게 규범이다. 언제까지? 진리를 발견할 때까지, 이게 최고의 상태다라고 할 때까지이다. 그런데 진리, 최고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 그러니 끝없이 개선해나가야 한다.
과학 기술의 원천 지식이라 할 수 있는 논문을 보면 이게 보인다. 논문은 ‘현재 사람들이 이렇게 알고 있는데, 이 부분이 문제가 있다. 이 부분을 새로 검증해보면 다르게 결과가 나온다’를 이야기한다. 서양에서는 이런 논문집이 르네상스 이후 몇 백년간 계속해서 발간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져온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바로 과학 논문이다. 그 계속 개선되는 과학 지식이 현실에 적용되면서 현대 과학 문명이 만들어진다. 동양 사회는 그 지식과 논문 형식을 현대화가 되면서 받아들인다. 동양 사회에서 절대적 권위자에게 딴지 거는 것이 가능해진 건 현대화, 서구화가 된 이후이다.
서구라고 해서 원래부터 그런 식은 아니었다. 서구 사회 문명의 또 다른 축인 기독교는 동양 고전 세계와 같다.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 예수의 말씀을 적은 기록이다. 누구도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없고, 성서에서 말한 대로 지켜야 한다.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딴소리를 하면 이단자가 되고, 지옥에 떨어질 사람이 된다. 절대적 권위가 있고 그에 대해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사회가 서양의 중세 사회이다. 동양 사회와 별다를 게 없는 사회였다. 그러니 이때의 서구 문명은 동양 문명보다 나을 것도 없다.
서구에 소크라테스 철학이 도입된 것은 르네상스 이후이다. 서구에서는 사라지고, 아랍권에서만 남아있던 그리스 로마 문화와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저서들이 이 당시 서구에 다시 유입된다. 그리스 로마 문화가 큰 유행을 타며 소크라테스의 철학도 받아들여진다. 기존의 상식을 하나하나 따져가며 현재 진리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 소크라테스의 방식이 서구 철학 사상의 기반이 된다. 과학적 진실을 추구하는 학회가 생기고, 논문이 작성되고, 기술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 이 시기 이후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 지리상 발견, 과학 기술의 발전, 새로운 발명품의 등장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시작된다.
토론 문화를 중시하는 서구의 교육 방식도 여기에 기반하는 것 같다. 우리 사회는 교과서의 말이 금과옥조이다. 교과서대로 해야 진리이고, 이를 어기면 문제가 된다. 진리가 정해진 상태에서 토론할게 뭐가 있나. 그냥 진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진리가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토론이 중요하다. 토론은 무엇이 진리에 가까운가를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서로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그 중에서 가장 좋아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동양에서 토론이 어려운 이유는, 교수가 한마디 하면, 사장이 한마디 하면, 좌장이 한마디 하면 그게 옳은 말이고 거기에 토를 달면 안된다. 무엇이 옳은지 정해졌기에, 따로 토론할 필요가 없다.
소크라테스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논어, 맹자, 한비자, 노자, 장자 등 동양고전을 배우자고 말은 하는데, 소크라테스를 배워야 한다는 말은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소크라테스라고 본다. 소크라테스 철학이 받아들여질 때, 현대 동양 사회의 문제점이라 하는 규범의 절대화-규범의 교조적인 측면이 완화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