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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인 Apr 21. 2024

지켜야 할 비밀

<비밀: the top secret>

만약 내가 살해당한다면, 사건의 해결을 위해 나의 뇌를 제공할 수 있을까?인의 단서를 찾는 과정에서 몇 년치의 기억이 읽힐 수 있다. 보다 정확히는, 내가 눈으로 본 모든 것 모니터에 나타나게 된다. 시미즈 레이코의 만화 <비밀: the top secret> 배경이다. 죽은 자의 뇌를 스캔하는 이 수사기법은 작중에서 MRI 수사라 불리며, 전담 부서인 제9수사실사건 해결이 옴니버스로 펼쳐진다.


MRI 수사는 끊임없이 그 윤리성을 의심받는 동시에 만능 해결책으로 추앙받는다. 제9의 실장 '마키'와 수사관 '아오키'는 인간적으로 흔들리면서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굳건하게 지켜나간다. 냉정한 천재 마키와 인정 넘치는 아오키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졌지만, 그들의 정의는 같은 지점을 향한다.

-MRI 스캐너는 흉악 사건의 수사 목적으로만 사용되며, 수사는 고인의 사생활을 최소한으로 침범하는 범위 내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원칙의 경계는 사람들의 욕망 앞에 쉽게 뭉그러진다. 이를테면, 외교부 장관의 딸을 납치한 범인이 중환자실에 누워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다. 진실은 그의 뇌 있고, 자연사를 기다리면 납치된 아의 생명도 장담할 수 없다. 범인은 찰의 입회 하에서 장관을 도발한다. 딸이 소중하다면 왜 나를 죽이지 않냐고. 장관은 오래 전 범인의 딸이 죽도록 방치했고, 이것은 그가 생의 마지막에 남기는 복수였다. 장관은 결국 범인을 죽이고 그의 뇌를 통해 딸을 구한다. 언론에서는 장관의 부성애와 MRI 수사를 추앙하지만, 마키는 절망한다. 를 꺼내기 위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어떤 악인이라 해도. 제9수사실이 지켜온 근본의 원칙이 차근차근 짓밟힌다.


완결 이후 10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비밀>의 배경은  엄벌주의와 '참교육'을 정의로 삼는 작금의 세태와 다르지 않다. 악인 하나의 목숨으로 해결된 사건은 언뜻 정의의 승리로 보이나, 정보와 인간의 목숨을 저울질하는 은 법의 영역을 벗어난다.  사적 복수, 생명의 차등적 가치가 야기하는 폭력을 막기 위해 법의 해석과 판결이 존재한다. 로는 그 해석의 여백으로 인해 부당한 판결이 발생하지만, 법에 대한 무용론적 태도는 정의 수호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비밀: the top secret> 12권

다른 에피소드에서, 어떤 과학자는 천문학 연구를 위해 동료 연구자의 뇌를 훔다. 그에게는  명분 있다. '과학의 발전을 위 일이다. 고인도 바라던 일이다.' 럼에도 마키는 명구제 외의 목적으로 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강경하게 내세운다. 대의를 내세워 뇌를 들여다보도록 허가한다면 고인의 뜻에 반하는 뇌의 반출도, 뇌를 얻기 위한 암살도 규제가 어렵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인간은 소우주에 비유된다. 세계의 실체란 없고 모든 것은 나의 지각이 만든 환상일 수 있다. 인간은 각자의 우주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한 과학자의 뇌로 우주의 비밀 하나가 밝혀졌다 한들, 그 대가로 하나의 우주가 파괴된 셈이 아닌가.


그렇다 해서 <비밀>은 무조건적인 문법의 수호만을 외치지 않는다. 법을 수호하는 주체도 결국 사람이기에 가해자가 된 피해자에게 연민을 품는다. 60년 전 아들을 살해한 범인에게 복수한 노인이 있다. 임종을 앞둔 범인이 자백했지만 공소시효는 지났다. 노인은 의식불명 상태의 범인을 찾아가  숨을 끊다. 95세의 노인. 가족들은 곁을 떠난 지 오래다. '어째서 곧 죽을 인간 때문에 살인자가 되느냐'며 노인을 질책한 마키에게, 노인은 역으로 질문한다.


아직도 이 손으로 지켜야 할 것이 내게 있나요?


앙상한 노인의 손 앞에서 마키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몇 년이 지나서야 그는 이 질문 상기하며 '그렇다'는 답을 내린다. 타인의 비밀을 수없이 떠안은 마키 스로 머리를 날리려 시도한 이후의 일이다. 비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두다. 음이 안식으로 느껴질 만큼.


그러나 살아있는 한 지켜야 할 것-지켜야 할 비밀이 생긴다. '비밀'이라 하면 수치스럽거나 위험한 기억이 먼저 연상되지만, 간직하고 싶은 모든 순간은 곧 '비밀'이 된다. 때로는 빛나고, 때로는 시간이 멈췄던, 실 이상의 무언가를 '보았던' 순간들. 설적으로, 간직한 비밀이 있기에 우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비밀의 순간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서로의 비밀을 지켜줄 수 있다.  를 꺼내지 않아도 타인의 과거를 폭로하기 간편한 세상. 비밀과 함께 사라질 권리는 타인과의 연결 속에서만 행사된다. 비밀 유지에 필요한 것은 고립이 아닌 연결, 파괴가 아닌 신뢰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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