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장녀란 단어는 한국에서 장녀로 태어난 이들을 말한다.
하지만 더 깊은 뜻은 장녀란 이유로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풍자하는 단어로 쓰인다.
물론 옛날 시대처럼 장녀라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고, 동생들을 위해 일한다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은근히 행해지는 차별은 바뀌지 않았다.
나는 동생이 생기면서 뭐든 한발 뒤로 물러서서 양보하고 배려해야 했다. 어쩌다 동생과 싸우게 되면 부모님은 동생 편이 되어서 내 잘못이 아니어도 먼저 사과를 하기 바랬고 그래야 끝이 났다.
나는 동생이 두 명이다. 2살 차이 남동생과 10살 차이 여동생이다.
남동생은 미숙아로 태어나 한쪽 귀의 청력이 완전히 소실되었고, 수십 번의 수술을 받아 심장에 핀을 박아 지금도 몸에 상처들이 있다. 그래서 예전부터 동생은 집보다 병원에 더 많이 있었고, 초등학교와 어린이집을 다녔을 때에는 재활병원을 매일매일 다녔다. 그러면서 우리 가족은 남동생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남동생이 태어났고 게다가 아프기 때문에 부모님은 보호자 신분으로 병원에 계셨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외할머니 댁에서 자주 지내게 되었다. 그때부터 점점 동생이 싫어졌다. 얼굴도 모르는 동생에게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빼앗기는 것은 어린 내게는 너무나도 힘들었다.
동생이 생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그때부터 알게 되었다.
동생이 병원에서 돌아왔지만 끝이 아니었다. 이제는 재활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동생을 따라서 재활병원을 가야 했다. 누나라는 이유로 맡은 책임이었다. 동생 때문에 그렇게 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친구랑 놀고 싶었고, 집에서 편하게 티브이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꼬박 3년을 넘게 동생을 따라다녔다.
힘들고 서러웠다. 엄마도 지치고 동생도 지쳤을 터이지만... 누나라는 이유로 해야 한다는 것이 속상했다.
나도 동생처럼 사랑받고, 관심받고 엄마에게 업히고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겉으론 아무런 내색하지 않았다. 부모님도 힘들고 가족 모두 다 힘든데 나까지 그러고 싶진 않았고, 아파서 병원 다니는 동생을 질투하는 것은 이기적인 것 같았다. 그래서 말하지 않고 홀로 꾹 참았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을 표출하지 않았던 내 속은 곪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재활병원에서 소아심리상담을 받았고 부모님이 이런 나의 심리상태를 알게 되었다. 그러고는 놀이치료를 받고, 엄마와 함께 동생이 없는 둘만의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것 때문에 곪아있던 상처는 점점 치유되가고 있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은 동생과 나에게 평등하게 갈 순 없었던 듯하다.
동생은 아프니까, 너와 다르니까 라는 이유가 항상 따라다녔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겐 그 말이 구차한 변명 같이 들렸다. "너와 다르니까"라는 말이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다르다고 그래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원더"라는 영화가 있다. 어기라는 안면기형장애를 앓고 있는 아이에 관한 이야기인데 거기서 어기의 누나가 나온다. 영화 장면 중에서 누나는 "어기는 태양이다. 엄마, 아빠와 나는 그 주위를 도는 행성이다."라고 말했다. 이 대사 한마디가 나를 대변해 주는 대사 같았고, 너무 공감돼서 울컥하기까지도 하였다.
어기의 누나는 꼭 나를 투영시킨 것 같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가족 이야기를 들으면 동생과 부모님을 제일 먼저 생각하고 걱정해 주었다. 어기의 누나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기의 누나는 가족들과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영화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나도 어기의 누나처럼 이 상황을 가족들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건 영화일 뿐이었다. 내 현실은 영화처럼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진행 중이다.
심리치료를 받아도 가족과 좀 더 시간을 보내도 마음속에는 여전히 관심, 애정이 고팠다. 그리고 든 생각.
나는 왜 하필 장녀로 태어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