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유진 Aug 31. 2023

미국 땅 끝에서 헤밍웨이를 만나다

미국 키웨스트 | Key West, USA


구글에서 미국 지도를 찬찬히 보면 대륙 최남단이라 표시된 부분이 있다. 두 손가락을 벌려 스크린을 확대하면 161km에 걸쳐 기다랗게 이어지는 섬들을 연결하는 도로가 보인다. 미국 최장 남북종단 도로인 1번 국도 US Route 1다.


“미국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를 달리는데 오픈카 정도는 타봐야 하지 않겠어?”

남편의 말에 그만 혹해 버렸다. 아차 하는 순간에 나는 흰색 컨버터블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는지 잠시 고민했지만 낭만파 남편의 버킷리스트라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남자의 로망’ 오픈카 드라이브를 즐겨보기로 했다.


플로리다 마이애미에서 출발해 섬과 바다와 다리를 차례로 지나며 4시간을 달렸다. 실선처럼 놓인 오버시스 하이웨이 Overseas Highway의 양 옆으로 코발트 빛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도 바다였다. 눈부신 태양이 물결 위에 미광을 비추고 있었다. 하늘도 바다도 우리도 푸른빛으로 하나가 되었다.


섬들의 징검다리 끝자락에서 키웨스트 Key West를 만났다. 플로리다 사람들은 섬을 아일랜드가 아니라 ‘키 Key’라고 부른다. 키웨스트는 그러니까 ‘서쪽의 섬’이다. 그리고 작은 섬 키웨스트의 사우던모스트 포인트 Souhternmost point에서 1번 국도는 끝이 난다. 이곳이 바로 땅 끝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케이프 아굴하스 Cape Agulhas에 이어 내 인생 두 번째로 밟아보는 땅 끝. 또 한 번 대륙의 테두리에 점을 하나 찍은 순간이었다.


온통 헝클어진 머리로 부표 모양의 최남단 사인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오픈카는 처음 20분만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이고 나머지는 리얼버라어티다. 내리쬐는 햇볕 때문에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세차게 불어닥치는 바람은 실시간으로 얼굴에 싸대기를 날렸다. 한 시간쯤 지났을 까, 도저히 참을 수 없던 나는 “차 세우고 뚜껑 닫아!”를 외쳤다. 이로써 남편의 오픈카 로망은 종료되었다.


Duval Street Key West


키웨스트는 어니스트 밀러 헤밍웨이 Ernest Miller Hemingway가 사랑했던 섬이다. 그는 키웨스트에서 10년 정도 살았는데, <킬리만자로의 눈>을 비롯해 다수의 작품들이 이곳에서 쓰였다. 세계적인 작가가 희대의 역작을 탄생시킨 곳은 어떨까. 궁금증을 안고 헤밍웨이가 살았던 집, 907 화이트헤드 스트리트로 향했다.


옛것들의 향수와 정취가 가득한 집에는 그의 많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집 안의 가구와 장식들은 대부분 헤밍웨이의 두 번째 부인인 폴린 파이퍼 Pauline Pfeiffer가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을 때 모아 온 것이라 한다. 부유한 집안 출신에 유명 잡지 보그의 편집자였던 폴린의 안목은 과연 남달라 보였다. 샹들리에와 목재로 된 수납함이 눈에 띄었다. 샹들리에는 유리 공예로 유명한 이태리 베네치아의 무라노 섬에서 만들어진 수공예품을 공수했다고 한다. 수납함은  지금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다.


유난히 고양이가 많이 보였다. 알고보니 헤밍웨이도 요즘 말로 냥이 집사였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집을 돌아다니는 30마리의 고양이는 그가 키웠던 고양이 스노 화이트의 후손들이라 했다. 발가락이 6개인 고양이 Polydactyl 들이다. 현재 이 집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으니, 어찌 보면 이 고양이들이 이 집의 주인인셈이다. 그래서인지 고양이들은 관광객들을 전혀 개의치 않고 마치 집주인마냥 유유히 집안팎 전체를 당당히 활보하고 있었다.


Ernest Hemingway House


집안 곳곳에 헤밍웨이의 인생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진들이 여럿 전시되어 있었다. 도슨트가 사진을 하나씩 짚으며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구급차 운전병으로 전투에 참가했으며, 미국인으로서 최초로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 때문에 전쟁영웅이 되었다. 그 후 헤밍웨이는 1920년 파리로 건너가 글을 썼다. 당시 예술의 황금기였던 파리에서 거트루드 스타인, 에즈라 파운드와 같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와 어울리며 습작에 열중했다. 그는 네 차례 결혼을 했다. 그의 대작들은 이들 뮤즈들과 함께 탄생한 영감의 기록물이기도 하다. 그는 스페인 내란 당시 종군 기자로 활동했다. 아프리카 여행당시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음의 문턱에 다녀오기도 했다. 죽음에 대한 경험과 그가 즐겨했던 투우와 사냥, 권투, 낚시와 같은 활동은 그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 죽음 사냥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제껏 일어난 일들, 있는 그대로의 것들, 알고 있는 모든 것과 알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작가는 창작을 통해 뭔가를 만듭니다. 그건 재현이 아니라, 살아 있고 진실한 그 어떤 것보다도 진실하고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며, 작가는 그걸 살아 있게 하고, 충분히 잘 만들 경우에는 불멸을 선사해요. 그게 바로 글을 쓰는 이유지 알려진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온갖 이유인들 어떻습니까?
어니스트 헤밍웨이


1952년 <노인과 바다>를 출판하고 1953년 퓰리처상을, 이듬해 노벨 문학상을 거머쥐며 헤밍웨이의 명성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그는 정신이 피폐해져 우울증에 시달리고 수차례의 전지치료와 자살 시도를 했다. 1961년, 헤밍웨이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듯, 자기 입에다 엽총을 쏘아 자살했다. 도슨트를 통해 들은 헤밍웨이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는 그가 남긴 말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있잖습니까," 그가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총으로 자살했어요." 침묵이 흘렀다. 헤밍웨이가 아버지의 자살에 대해 절대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하세요?" 내가 물었다. 헤밍웨이는 입을 꼭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모든 사람의 권리지만, 거기에는 약간의 이기주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약간의 경시가 담겨 있어요."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House


방을 이동하니 헤밍웨이가 사용했던 타자기가 눈에 띄었다. 수많은 걸작들을 탄생시킨 바로 그 타자기다. 그는 매일 아침 6시, 어김없이 이 타자기 앞에 앉았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가의 삶이란 참으로 길고 지루하고 가차 없고 무자비한 싸움의 연속이라고. 그 싸움의 연속을 뚫고 명예롭게 살아남는 일이란 참으로 어렵고 중요한 일이라고.

There is nothing to writing. All you do is sit down at a typewriter and bleed.
글을 쓴다는 것은 별 게 아니지. 그냥 타자기 앞에 앉아 피를 흘리면 된다네.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쩌면 그는 전쟁에서 입은 총상에 버금가는 고통을 타자기 앞에서 느낀 건지 모르겠다. 글을 써 내려가며 그가 느꼈을 수많은 고뇌와 환희의 시간을 생각해 봤다. 동이 트는 아침, 힘겨운 햇살을 받으며 타닥타닥 타자기 소리와 함께 아침을 열었을 그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백발 수염과 머리가 성성한 말년의 헤밍웨이의 아름답고도 슬프고 고통스러운 뒷모습 말이다.



#키웨스트 #땅끝마을 #헤밍웨이

작가의 이전글 평일에 유모차 끄는 스웨덴 남자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