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성 과정에 눌린
처진 눈썹에 부은 얼굴. 말 끝을 흘리는 말투. 한 번씩 내쉬는 한숨으로 대화가 끊기기도 하고.
완력에 체념한 모습이 발악하는 꿈틀거림조차 놓아버린 듯 맥이 풀려있고, 힘없는 시선이 세상 너머를 물끄러미 초점을 방치한 모습이다. 갓 환갑을 넘긴 나이에 이젠 추운 게 너무 싫다고.
떠올릴 수 있는 첫 기억이 세 살인지 네 살인지. 따뜻한 봄날의 나른한 안온함과는 무관하게 냉기 가득한 표독함이 사진처럼 눈앞에 머문다. 엄마의 손을 잡고 처음 간 외갓집. 육중한 나무 대문을 무겁게 밀고 들어선 엄마는 십 년 만의 친정 방문에도 반가움이나 기대감 없이 마당을 밟는다. 오래간만에 찾은 친정집인데도 경계의 분위기가 집안 가득하고, 어린 그의 눈엔 넓은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자기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외할머니의 꽉 다문 입에 서린 차가운 시선이 얼음처럼 박혀있다.
한 참을 말없이 바라보던 외할머니의 첫 말은 얘냐? 고개를 돌린 엄마는 그의 손을 꽉 움키며 말이 없다. 처음 본 외손주를 뛰어가 안아줄 만 한데, 앉은자리에 드리운 처마 그림자 속에서 꼿꼿한 외할머니의 엄격한 모습은 그가 초등학교 들어갈 나이가 된 사 년 후에 다시 본 영정사진 속 외할머니와 여전했다. 생사가 바뀐 동안의 시간 간극은 첫인상 그대로 박제되어 바뀌지 않고 겹쳐져 다시 그의 오금을 저리게 한다.
외할머니의 장례식날. 분주한 분위기에 경황없는 그 상황에서 이모가 그에게 한 말은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건 너 때문이야. 이유도 과정도 없다. 왜냐고 물어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어린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왜 그런지 모른다. 서 있는 어린애에게 찬물을 뒤집어 씌운 그 말을 기억하면서 허탈해하는 그가 있을 뿐.
결혼 칠 년 만에 얻은 아들. 어렵게 얻은 자식인데 그동안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몰라도 엄마는 그에게 살갑지 않았다. 한번 질이 난 몸의 반응은 연년생으로 딸을 낳았으나 그녀는 둘째에게도 그렇게 정이 쏠리지 않았던가 보다. 낯선 시댁 식구들에 빨리 적응하려 했고, 시집 온 집안에서 잘해보고자 한 노력들이 손주를 자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이들에게 너무 늦은 소식으로 답한 게 그들을 지치게 했으려나. 이삼 년을 후사 소식 없이 보내고 석녀 취급을 받고서 설움과 낙담 중 얻은 자식들에 섭섭함이었을까.
그가 입학하기 전, 동생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내리막길에서 리어카를 끌던 노인의 운전 미숙으로 동생의 왼 발이 심하게 꺾이고 긁혔다. 무거운 짐을 실은 수레가 급경사를 내려가면서 노인은 속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앞서 걷던 여동생을 밀치고 말았다. 다친 곳 없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수레에 끌려가던 노인의 모습은 벌써 멀리 떠나고, 넘어진 동생의 다리에 남은 흉터는 평생 그의 탓으로 남았다. 모친도 동생을 잘 돌보지 못한 그를 탓하긴 마찬가지였고.
코 흘리게 입학식날 엄마는 학교 입구까지 그를 데려다 주곤 바쁘다며 집으로 가버렸다. 그러지 않아도 내성적이고 눈치 더딘 그는 그렇게 넓은 학교 운동장에서 부산한 어른과 또래들 사이에서 어디로 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했다. 꼼짝없이 몇 번을 두리번거리기만 하다 이내 북받쳐 서서 울었다. 다른 부모들처럼 선생님을 찾아 애를 잘 부탁한다는 말은 아닐지라도 곁에 아무도 있어주지 않은 서러움과 무서움은 졸업할 때까지 그의 입을 얼어붙게 했다. 고립부터 시작한 그는 친구들과 잘 얘기하지도,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지도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대화엔 눈을 피하고 입안에서는 웅웅 거리기만 한다.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위축되고 긴장하기도 했지만, 상황의 반복으로 그는 본인의 혀가 짧아서 말을 못 하는구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말을 연습한 건 한 참 후다. 그렇게 비자발적 벙어리 노릇은 교과서 아닌 책들을 눈으로 주섬주섬 읽게 했고, 어느 순간 방에서 혼자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며 문득 목소리를 찾아야겠다는 자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연습했다며, 아직도 그는 본인의 목소리가 이상하지 않냐고 묻는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근처에 서 있기만 했던 그에게 화살이 쏠린 것도 처신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가벼운 모함이나 공범의 누명은 어리숙한 그를 이용한 주변인의 이용이었다. 어려서는 참외나 수박 서리 하려고 작당한 몇몇이 그에게 밭 입구에 잠시만 서 있어 달라는 부탁을 들어준 탓에 정작 주인에 붙잡힌 사람은 그다. 나중 취직해서 이간질로 착취하는 동료 곁에 앉아있었다는 이유로 집단 따돌림을 당한 것도 그다. 자신은 아무런 의도도 이득도 본 것 없노라 해명을 해도, 손해의 책임을 묻고 동조 세력이라는 지목의 따가운 시선은 그를 지치게 했다.
결단력이 부족하지만 나름 착하고 성실한 그에게 시집온 그녀는 결국 그의 우유부단함에 질려 이혼하고, 마흔에 돌아가신 어머니는 끝내 헛말이라도 다정함이 묻은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으며, 재작년 여동생은 그에게 생의 곤궁을 견디기 힘들다며 스스로 마감했다.
봄 햇살이 따사롭고, 산들바람이 불어도 그런 온기는 그에 몸에 닿지 않는다. 그런 부드러움은 남들에게나 느껴지는 감각 아니냐고. 등뒤 겨울 햇살로 몸을 데우며 그는 담뱃불을 당긴다. 따뜻해졌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