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독립 Mar 14. 2022

방종하다가 깨달은 자유의 의미

혼자, 둘이 사는 이야기 4

사회의 규범 혹은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정답의 삶을 벗어나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에 집중하고,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해 나갈 수 있는 미래란 나에게 꿈이자, 희망이자, 이룰 수 없는 환상 같은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공부머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서울의 누구나 알 법한 대학에 입학하고, 큰 문제없이 대학원까지 졸업한 후에는, 대기업에 취업을 했다. 나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붓는 사람들이 언제나 있다는 것을 잊은 적도 없으며, 나에게는 내 분에 넘치는 운이 항상 뒤따랐다고 인정한다. 누가 옆에서 본다면 요즘 말로 ‘될놈될’ 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혹자의 눈에는 쉬운 인생으로 보여서일까, 나는 내가 가보지 못한 길을 숭배했다. 


30년 가까이 학생을 가르쳤던 엄마 입장에서 남부럽지 않게 정도를 따라가는 언니에 비해, 나는 걱정스러운 아이였다. 왜 남들 하는 대로 하지 못해 안달일까, 왜 모범적으로 굴지 않는 걸까, 가 엄마의 주요한 걱정 중 하나였다. 실제로 나는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소위 ‘일진’의 삶을 동경해 보기도 했고,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내일이 없는 것처럼 술과 담배, 클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는 것을 꿈꾸기도 했으며, 공부나 취업이 아닌 다른 길을 언제나 갈구했고, 현란한 머리색과 개성 있는 타투에 휩싸여 길을 가다가 어느 포토그래퍼에게 ‘사진 한 장만 찍어도 될까요?’ 라며 칭찬받는 OOTD 속의 나를 상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엄마의 생각처럼 삐뚤어진 사춘기를 보내 보지도 못 했고, 본격적인 날라리처럼 놀아 보지도 못 했다. 내가 큰 노력을 하지 않고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아주 조금 꿈틀거려 보았을 뿐이었다.




예를 들어, 고등학교 때는 당시 유행했던 오버핏의 스포츠 브랜드 바람막이를 입고 싶었다. 하지만 재직 중인 학교의 학생들이 그런 걸 입고 다니는 걸 불만스러워 하던 엄마가 나에게 따뜻하지도 않고 보기에도 불량스러워 보이는 그 옷을 사줄 리는 만무했고, 그렇다고 패션에 엄청난 열망이 있어 용돈을 모으거나 아르바이트를 할 만큼의 의지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집에 있던 아빠의 낡은 바람막이를 찾아 입고 다녔다. 체격이 작은 편이 아닌 아빠의 옷은 왜소한 나에게 오버핏을 넘어, 버려진 옷을 주워 입은 거지꼴을 선사해주었다. 심지어 색깔은 한눈에 당시 민주당을 떠올리게 하는 형광에 가까운 진한 하늘색 또는 한나라당을 떠올리게 하는 시뻘건 고추장색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직접적으로 ‘너 그거 입은 거 진짜 이상해.’ 라고 하지 않았고, 봄, 가을이면 그 바람막이를 돌려 입었다. 학교 선생님들이 “걔 좀 가난해?" "아니, 걔네 엄마 옆 학교 선생님이잖아." "그런데 왜 저러고 다녀?” 라고 뒤에서 하던 말이 엄마한테까지 전해졌고, 가끔 “그건 누구 옷이야? 산 거야?” 라며 묻던 같은 반 아이들 역시 나의 옷을 이상하게 보았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음악을 업으로 삼고 싶기도 했는데, 부모님은 ‘네가 그럴 만한 재능이 있으면 투자하겠지만 넌 그 정도의 재능은 없잖아. 취미로 삼고 즐겁게 살면 되지.’ 라는 반복적인 말로 내 주장을 일축했다. 초등학교 때까지 배운 피아노 말고는 내가 하고 싶은 음악을 배워본 적도 없는데 재능을 어떻게 키우냐고 소리치고 싶은 반항심을 미뤄놓으면, 아무것도 배우지고 않고도, 아니면 적어도 나만큼만 배우고도 너무나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산더미기 때문에 음악도 포기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탤런트는 너무나도 미약했고, 공부에는 그래도 음악보다는 더 나은 재능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이다. 


일생을 함께 하기로 결정한 조슈아를 맨 처음 좋아하게 된 것도 그의 직업과 외모가 큰 역할을 했다. 군 전역 후 아르바이트하던 고깃집에서 반찬을 만들다가 요리에 눈을 떴고, 조슈아는 그대로 인서울 경영학과를 중퇴하고 전문대에 입학해 요리를 배웠다. 압구정에 있는 유명 파인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조슈아를 처음 만났는데, 함께 이태원에 있는 파스타집에서 가니쉬로 나온 재료에 대해 설명해주거나 요리에 들어간 허브를 추측하는 모습이 어딘가 전문적이면서도 자유로워 보이는 삶이었다. (당시에는 하루에 15시간씩 일하는 것을 몰랐다.) 이후에 다시 만났을 때 조슈아는 꽤 유명한 빵집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매일 산더미 같은 공짜 빵을 뜯어먹으며 그의 팔에 새겨진 커다란 문신을 구경하면 내가 원하던 삶을 그가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옆에 있으면 나도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요리와 제빵에 엄청난 공부가 필요하며, 이 때도 하루에 12시간씩 일했다는 것을 안 것도 나중 일이다.)


그나마 내가 해본 것은 방탕한 삶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하며 경기도 남쪽에서 사대문 안까지 통학을 하는 것은 학부 4년으로 충분하다고, 나는 이제 밤새 공부할 거라고 자취를 시작한 때였다. 자취생활 중에 수도 없이 밤을 샜지만, 그 새벽의 95%는 취기로 채워졌다. 새로운 술집이 생기면 마감이 언제인지부터 찾아보았고,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한 근을 사다 삶아 놓고 담금주 사이즈의 페트 소주와 맥주 피쳐 대자를 여러 병씩 사서는 같이 자리한 누구 하나가 쓰러져 잠들어도 상관하지 않고 술을 먹기도 했다. 조금 더 프라이빗한 단계에서도 방탕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생활을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자유로운 생활에 취해 아무것도 돌보지 않고 놀다가 몸이 상하고, 마음까지 상해버려 한참을 우울과 두려움 속에 지내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고 깨달았다. 나는 자유를 누린 게 아니라 방종을 해 버린 것이라는 것을. 이건 내가 꿈꾸던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는 것을.


어쨌든 이렇게 막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만도 못 한 꿈틀거림 외에는 결국 사회의 정답을 따라가던 나의 종착지는 대기업이었다. 싸가지는 좀 없을지라도 시키는 건 다 해내고 업무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며 말을 잘 듣는 사원으로 지낸 지 2년, 완치 판정을 받은 지 2주도 되지 않아 다시 도진 질염에 질려버린 날, 조슈아가 집에 오자마자 그에게 말했다. “나 퇴사할래.”




회사를 그만 두더라도 1년 정도는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걸 제외하면 아무런 계획도 없었다. 박사를 준비할 수도 있었지만 정말 내가 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았고, 다른 회사를 가자니 결국 회사라는 조직과 나는 맞지 않는다는 생각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집에서 아무런 경제적 활동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었고, 예전에 포기했던 음악이나 글쓰기로는 입에 풀칠은 커녕 흙도 주워먹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회사를 그만 두어야 했다. 하루 종일 회사에 앉아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팀장을 어떻게 공격하고 죽이면 좋을지 공상하거나, ‘내가 가벼운 교통사고가 나면 나에게 일을 안 시키지 않을까? 아니야, 내가 아예 죽을 정도는 아닌 치명적인 병으로 휴직을 하면 그 동안 자기들끼리 어떻게든 뭐든 해내지 않을까?’ 라는 상상만 주구장창 하고 있는 나는 몸과 마음을 돌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제서야 내가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삶을 고민해 볼 때라고 실감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혼자 자는 밤은 춥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