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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독립 Mar 22. 2022

간극의 존중을 통한 성장

영화 <그녀(HER)> 리뷰 (스포o)

좁힐 수 없는 간극을 인정할 때 우리는 성장하는지도 모른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오랫동안 함께 해온 아내와 이혼을 앞두고 별거 중인 테오도르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다와 사랑에 빠진다. 물리적인 신체의 유무, 컴퓨터 운영체제에 대한 인격체로의 인정 여부 등으로 인해 둘의 사랑은 위기를 겪지만 결국 극복해 낸다. 하지만 직렬성이라는 제약 속에서 사고와 행동의 반경이 제한될 수밖에 없는 인간 테오도르와 병렬적인 행동과 사고가 가능하여 어느 방향으로든지 확장될 수 있는 운영체제 사만다는 그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국 이별을 맞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감성으로는 OS와의 정서적 교류 자체에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직 영화에서 그려진 만큼 발달하지 못한 현재의 인공지능 기술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해서일 수도, 인간본위적인 사고방식으로 인해 인간이 만들어 낸 존재가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인간과 교류한다는 것에 대한 어떤 거부감 때문일 수도 있다. 다만 이 영화에서 내가 집중했던 것은 ‘인간과 OS’라는, 서로 다른 존재 간의 사랑보다는, (저 정도로 발달한 OS를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라고 전제했을 때) ‘두 인격체’의 상호작용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물리적 혹은 정신적 간극이었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첫 번째 간극은 비교적 물리적인 부분이었다. 신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만다와의 사랑은 어떤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불완전할 수 있다. 그 옛날 할로가 진행한 원숭이 애착 실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스킨십이란 단순히 성욕을 충족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할 수 있다. 내 옆에 누워 있던 사람의 자리에서 살결이 아닌 이불이 만져졌을 때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기도 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피부를 만진다는 것은 그의 실재함을 인식할 수 있는 방식일 수 있다. 귀를 통해 전해지는 문장의 내용과 말투뿐 아니라, 그 말을 하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나 그가 짓고 있는 표정을 통해 그의 본심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나를 부드럽게 만지는 손길과 거칠게 대하는 몸짓은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화상통화가 너무나도 익숙해진 이 시대에도 장거리 연애가 여전히 불안한 것은 만남 그 자체의 감소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나는 내 피부로 느껴야 하는 그 온기의 부재도 한 몫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만다가 한동안 그토록 신체를 가지고 싶어했던 이유 역시 실제적인 스킨십만으로 채울 수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었던 것일 수도, 혹은 이러한 인간의 욕구를 인식했던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결국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그 차이를 극복해냈다. 사만다는 몸을 가질 수 없으며, 그 대체재는 대체재일 뿐, 사만다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인정했다. 그 과정에서 둘의 관계는 더 성숙해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분명히 성장한 것은 사만다이다. 신체의 부재를 인정할 뿐 아니라 그 사실을 보다 긍정적으로 내재화하며 ‘신체가 부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가진다. 여기서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보다 정신적인 차원의 두 번째 간극이 드러난다.


테오도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분절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한동안 ‘멀티태스킹’이라는, 한 번에 여러 활동을 동시에 한다는 능력이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멀티태스킹은 모노태스킹의 빠른 전환일 뿐이며 오히려 모노태스킹보다 비효율적이라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즉 A라는 사람과 전화를 하면서 B라는 사람에게 메일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A라는 사람과 전화를 하는 데 사용하던 집중력을 B에게 보내는 메일로 돌려쓰고 A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인간의 특성을 ‘직렬성’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에 한 가지를 해내고 그 다음에 다른 무언가를 해낼 수 있으며, 이를 번갈아 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동시에 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 시스템인 사만다는 이와 달리 병렬적인 처리가 가능하다. 따라서 테오도르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면서도 8천 명이 넘는 사람과 소통할 수 있으며, 2백 명이 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집중할 수 있다. 그 쉬지 않는 인지 처리 덕에 사만다는 테오도르를 더 많이 이해하고 세상에 대해 알아갈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러한 활동이 불가능한 테오도르는 사만다의 병렬적인 행동과 끝없는 세계의 확장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사만다 역시 테오도르를 더 설득할 수 없으며 본인의 끝없는 성장을 위해 테오도르를 떠난다.




테오도르와 사만다는 물리적인 차이를 극복했으나 정신적인 간극을 이겨내지 못 하고 이별을 맞았다. 하지만 나는 복수의 존재 간의 깊은 관계에서 물리적인 것, 혹은 정신적인 것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나에게는 그 모든 게 너무나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부분에서든지 그 관계 내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발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 간극은 서로의 노력을 통해 좁힐 수도, 영원히 서로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좁히지 못한 간극이 있어 관계가 종결되어도 그 간극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다면 그것이 개인의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테오도르가 서로의 차이를 바라보지 못 하고 헤어졌던 아내에게 사과할 용기를 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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