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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국퀴어 Nov 28. 2022

2. 어쩔 수 없는 강원도 사람

감자국퀴어 연말 인터뷰

사회 : 라일라(팟캐스트 '페어북 ; 페미니스트 퀴어 북클럽; 공동 기획자 겸 진행자)

참여 : 조재, 정한새(감자국퀴어)




라일라
그러면 저희 이제, 지방의 퀴어 청소년 시기를 지나 우리가 성인이 된 이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두 분 다 성인이 되고 내가 살아온 고향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되는 경험에 대해서도 많이 써주셨어요. 한새 님은 강원도가 고향이라고 밝혔을 때 사람에게 관광지로 인식되는 경험에 대해 써주셨는데, 저도 고향을 떠난 후에 그런 말을 자주 들었어요. 그건 저희가 강원도 안에 있을 때는 들을 일이 없는 말이잖아요.

한새 님은 강원도를 떠나시는지 몇 년 되셨으니까 이런 질문을 더 많이 받으셨을 것 같아요. 타지에서 생활하시면서 좋든 싫든 내가 강원도 출신이구나, 라는 정체성을 느끼게 했던 경험이 있으셨나요?


정한새

춘천 사람이구나, 라고 느꼈던 일화가 지금 애인 분이 예전에 저한테 물어본 게 있어요. “춘천 사람은 다 닭갈비 팬이 집에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제가 그 질문을 듣고 당황해서 ‘춘천 사람이라고 다 닭갈비 팬이 집에 있진 않죠, 근데 저는 있어요’라고 한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이 대화를 하고 얼마 후에 조재 님하고 라일라 님에게 물어봤을 때 두 분 다 저랑 똑같이 대답하셨잖아요. 근데 저는 이런 류의 질답은 재밌기도 하고 정체성 면에서 설득력도 있지만 여전히 밈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모든 제주도 사람이 귤을 키우는 건 아니지만 우리 집에는 귤나무가 있다, 모든 강원도 사람이 감자 농사를 짓는 건 아니지만 우리 집은 감자를 키운다, 이런 것처럼요. 물론 저도 감자 농사지었던 적이 있지만요.

근데 최근에 라일라 님이 하셨던 말씀 같은데, 지인분이 이사하였는데 ‘여기 되게 춘천 같지 않아?’라고 하셨다는 얘기 기억나세요?

   

라일라

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있죠.

 

정한새

그 얘기 듣고 제가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내가 이때까지 집을 고를 때 무슨 조건이 우선이었나. 저는 늘 녹지가 있는 곳에 살았더라고요. 지금 집은 아파트 단지이긴 하지만 조금만 걸어가면 공원이 있거든요. 이전 집은 산자락에 있었고. 저는 지금까지 모두가 당연히 그걸 우선시할 거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그게 ‘춘천 같아서’였나? 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됐어요.

올해 휴가를 대전으로 갔는데 거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거든요. 그것도 결국 제가 대전에서 춘천을 떠올려서 그런 게 아닌가 싶더라고요. 묵었던 호텔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하천과 산책로가 있었어요. 거길 걷는데 너무 좋더라고요. 그 산책로 끝에 대형마트가 있어서 다녀왔는데 거기는 들어가자마자 나오고 싶고 기억도 안 나고.

   

라일라

아마 개인 취향도 있겠지만 사람이 태어나고 살아온 성장 환경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보니 무의식중에 익숙한 환경을 찾는 것 아닐까, 싶더라고요. 춘천에서 자란 친구들이 계속 녹지가 있는 지역에서 지내고 싶어한다는 것도 그렇고요. 저는 옥수수를 사 먹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 제 강원도인으로서의 정체성 같습니다.


조재
춘천에서 발행되는 잡지 중 ‘춘천의 화양연화 같은 시절’을 싣는 꼭지가 있습니다. 매호마다 주제가 달라지는데 이번 호의 화양연화 주제는 육림고개예요. 그런데 이 육림고개에 대한 기억이 시대마다 다른 거죠. 어르신이 기억하는 육림고개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전거도 못 끌고 다니고, 잠깐 집중이 흐트러지면 애들 손 놓쳐서 잃어버리는 장소였던 거죠. 저는 특정 시대의 사람이 기억하는 화려했던 시절이 춘천의 정체성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다음에는 강촌도 있죠. 저희는 MT의 대표 장소 정도로 생각하지만 옛날의 강촌은 흔들다리가 굉장히 유명했던 곳이에요. 흔들다리가 지어졌다가 부서지고를 반복하다가 지금은 작게 설치해뒀는데 사람들이 그 흔들다리에 가진 추억이 아주 많더라고요. 또 강촌에 유원지가 있었고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유원지에 갔다, 이런 것들. 아마 저희 세대는 또 다른 화양연화를 기억하고 있겠죠. 그런 시대를 점유하는 공통의 기억이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라일라

작년에 춘천퀴어문화축제 슬로건이 ‘소양강 퀴어’였잖아요. 그걸 보고 ‘아, 나는 한 번도 소양강이 춘천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는데 외부에서는 소양강 처녀가 춘천의 정체성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두 분이 보는 춘천의 정체성이 무척 궁금해서 질문을 드려보았습니다.


조재

아, 춘천은 물의 도시라는 이미지도 강한데, 특히 댐이 세 곳 있어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우리는 모르지만 댐을 세우면서 수몰된 지역이 생겼을 거잖아요. 그래서 수몰 지구와 관련된 이야기가 아주 많거든요. 기억하는 사람한테는 아주 큰 사건이었던 거죠.

 


라일라

같은 지역에서 성장하고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지는 춘천의 이미지는 어느 정도 비슷하면서도 또 조금씩 다르다는 게 흥미롭네요. 하지만 뭐가 됐든,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은 ‘관광지’라는 느낌으로 내 고향을 바라볼 수 없는 무언가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게 춘천인으로서의 정체성일 테고요.

그럼 이제 정체성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저희가 느꼈던 지방의 큰 특징에 대해서 언급해볼까 해요. 수도권에 비하면 모든 지역이 그렇긴 하겠지만 아무래도 대중교통이 덜 발달한 지방일수록 차가 필요한 경우가 많잖아요. 그렇게 넓지도 않은데 차가 없으면 이동하기가 어렵고 시간도 많이 들고요. 대중교통은 부족하거나 불편한 경우가 많은데 두 분은 그런 경험 때문에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에 대해도 써주셨어요. 조재 님은 자차가 필요했기 때문에 오토바이를 탔고, 그 덕에 삶의 반경이 넓어졌다고 하셨고, 한새 님은 차가 없어서 장거리를 이동하는 게 부담스럽지 않고 일정을 여유롭게 잡는 성격이 되셨다고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결국 이동권 제한이라는 한계를 통해 각자가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하셨다는 이야기도 될 텐데, 이런 교통의 경우처럼 춘천의 부족한 인프라가 두 분의 가치관에 영향을 준 다른 예가 있을까요?


정한새

아무래도 도서관 가는 게 당연한 삶이 된 거? 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방과 후 시간이나 주말에 저를 도서관에 데려다주셨어요. 저는 도서관에서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컴퓨터도 하면서 지냈어요. 물론 부모님의 교육 방침도 있었겠지만, 만약에 춘천에 키즈카페나 복합쇼핑몰이 있다면 어머니의 선택지가 달랐을 수 있죠. 덕분에 저는 계속 책을 접하는 분위기에서 자라왔고 지금도 집 구할 때 도서관과 가까운 곳일수록 마음이 가요.

물론 녹지랑 도서관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녹지를 고를 겁니다. 책은 살 수 있지만 산을 쌓을 수는 없으니까요.


조재

아마 지방에서 자랐다는 사실이 제 성격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경쟁을 극도로 싫어하고 느긋한 성향이거든요. 그런데 수도권에서 살았다면 워낙 경쟁이 치열한 곳이니까, 경쟁이 당연하다고 여기거나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으면서 살았을 것 같아요.
 
라일라 
예전에야 자신이 자란 지역을 떠나는 일이 없었지만 이제는 이사도 많이 다니고, 사람들이 섞이면서 지역 간의 격차가 많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자란 환경을 무시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한새

저는 라일라 님 보면서 아, 지방 사람이 좀 패기 같은 게 있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은 있어요. 라일라 님이 어렸을 때부터 뮤지컬이나 콘서트 같은 행사 간다고 혼자 서울에 많이 왔다갔다 했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오히려 지방에서 자랐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도전하거나 낯선 곳에 가는 걸 덜 두려워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라일라 
아, 제가 그랬죠. 지하철로 30분 거리도 멀다고 하는 서울 사람과는 다르게 두 시간 KTX 탑승? 귀여운 수준이다. 그러게요, 말씀 들어보니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번에는 약간 주제를 틀어서, 결국 춘천을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해요. 조재 님은 춘천에 살고, 한새 님은 경기도에 사시잖아요. 그리고 지방에 남는 사람만큼 떠나는 사람도 많고요. 저희끼리도 왜 우리는 지방을 떠나게 될까, 왜 지방을 떠나고 싶어 할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시기도 있었고요. 물론 그건 결국 우리가 소수자이기 때문이겠죠? 만약 우리가 정상성에 속한 사람이었다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를 아는 사람이 많다는 건 단점이라기보다 ‘인맥’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게 되지 못하는 건 내가 퀴어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조재 님이 쓴 ‘질병은 사는 곳에 따라 다르게 닿는다’를 보면 재난이 되어버린 질병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 지역 공동체에 속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느끼셨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결국 그럼 우리가 노년에는 대도시에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혼자 사는 퀴어 여성이 지역 공동체에서 정상성을 영위할 방법이 아주 적고 익명성에 기대어서라도 대도시로 가야 하나, 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새 님은 지방 사람이 서울로 옮겨갈 때 그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복잡한 마음이 든다라는 말씀을 해 주셨고요. 이처럼 우리가 결국 서울을 선택하고 마는 사람을 이해하게 되어버리는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퀴어 정체성과 아웃팅에 대한 두려움, 폐쇄적인 문화 말고도 무엇이 우리를 떠나고 싶게 만드는가. 두 분이 실제로 떠났느냐 아니냐와 별개로 어떤 것이 두 분을 떠나고 싶게 만들었는지, 그런 순간이 있다면 언제였는지가 궁금합니다.


정한새

저는 춘천이 문제였던 건 아니고, 부모와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독립적인 생활을 유지하는 게 너무 중요했는데 그러려면 간섭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럼 뭐가 내 인생에 간섭하냐. 사실 내 가족, 특히 부모거든요. 그러니까 저는 부모와 떨어져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부모님이 싫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그때 정했던 기준은 차로 한 시간 반 거리였어요. 왜냐면 제가 차가 없어서 그거보다 멀어지면 부모님에게 갑작스러운 사고나 급한 일이 생겼을 때 대처하기가 어렵겠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랬을 때 춘천을 기준으로 차로 한 시간 반 거리면 영동으로 가거나 수도권으로 가거나였고, 서울에 있는 대학이 저를 합격시켜주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라일라 

제가 알기로 한새 님 가족이 여러 이유로 더 이상 춘천에 살지 않는데, 그럼 이제 춘천으로 가셔도 되는 건가요?


정한새

이론적으로는 그렇죠. (비록 해고당했지만) 직장이랑 전세 계약한 집이 경기도에 있어서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데 그런 조건이 없었다면 춘천에서 계속 살거나 돌아갔을 거예요. 왜냐하면 산과 호수와 도서관이 있잖아요. (일동 폭소)


라일라

그럼 한새 님은 춘천을 ‘떠나고 싶’으셨던 적은 없는 거네요.


정한새

그렇죠.     


라일라

조재 님은 어떠세요?     


조재

저도 오로지 사람 때문인 것 같아요. 지금 가장 아쉬운 건 퀴어 친구들하고 모임을 오랜 시간 같이 했는데 그 친구들이 다 떠났어요. 대학생일 때 만났는데 각자 직장을 구하면서 그 직장이 있는 곳으로 떠났거든요. 춘천에 남은 친구가 몇 없어요. 친구가 없으니까 회사 안의 인간관계에 집중하게 되는 것 같아요.  


라일라 
저는 두 분 중에서는 조재 님 쪽에 좀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저는 지금 사는 곳보다 춘천이 더 좋긴 한데 그 이유가 춘천에 친구가 있어서거든요. 그러니까 춘천으로 조금 더 가까이 이사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하죠. 한새 님은 사람 때문이라기보다, 본인이 좋아하는 조건에 맞는 곳이면 되는 거고요.

그럼 결국 두 분 다 ‘서울’ 자체를 선택하고 싶으신 건 아닌 거네요?     


조재

서울이 부러운 건 좋아하는 운동을 배울 수 있는 선택지가 많다는 거예요. 저는 운동하는 걸 좋아하는데 춘천은 배울 곳이 적어서 그게 아쉬워요.     


정한새

저는 서울을 선택하는 순간이 온다면 퀴어 프렌들리한 병원이 많아서가 이유이지 않을까 싶네요.



라일라

퀴어 프렌들리한 병원 이야기를 하셔서 생각났는데 우리는 보통 서울이 퀴어 프렌들리하다고 생각하잖아요.     

조재

사실 서울이 그렇다기보다는 인구가 많고, 그러다보니 표본이 다양할 수밖에 없으니까 상대적으로 그렇게 느껴지는 거 아닐까요. 저는 서울이 퀴어 프렌들리한 도시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라일라

아, 그럼 좀 더 정확하게. 서울에 퀴어 프렌들리한 병원도 있고, 시민단체도 보통 서울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퀴어 프렌들리한 행사나 모임에 참여하려면 서울에 가야 하니까 보통 서울이 퀴어 프렌들리한 도시라고 생각하고 또 여기잖아요. 그런데 한새 님은 ‘오히려 그러므로 세밀하게 혐오하기도 한다’고 글에 쓰셨어요. 서울이 오히려 더 혐오적일 수 있다는 의미로 읽혔는데, 어떤 뜻으로 쓰신 글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정한새

제가 지방에 살 때는 사람들이 서로를 뭉뚱그려서 본다고 느꼈어요. 서로 동류일 거라고 생각한단 말이에요. 우리가 대충 하나의 사각형 안에 있는 거죠. 그런데 서울 같은 대도시, 특히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세계적인 도시로 가면 사각형 안에 있지 않단 말이에요. 나름의 도형이 있어요. 지방에 있을 때는 적당히 사각형 안에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도 서울로 가면 다른 도형이 되어버리는 거죠.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 사이에 균일하다고 할 만한 기준 역시 사라지기 때문에 더 세세하게 타인을 판단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제가 살던 곳에서는 타투만 해도 눈에 띄었어요. 서울에서는 타투? 할 수 있지. 그런데 대신 타투를 하는데 담배도 피우는 사람. 이렇게 사람을 따지는 게 세밀해지는 거죠. 얘는 타투도 하고 담배도 피우는데 눈썹 피어싱도 했어. 얘는 타투도 하고 담배도 피우는데 눈썹 피어싱도 했는데 직업이 없어. 얘는 타투도 하고 담배도 피우는데 눈썹 피어싱도 했고 직업도 없는데 퀴어야. 이런 식으로 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주 세밀해진다고 느꼈어요. 훨씬 다양한 요소를 접하니까 그만큼 저를 더 나누는 거죠.

그런데 제가 지방에 있을 때는 저는 정씨 집안의 살찐 딸이었거든요? 근데 서울에서는 더 이상 그렇게 불리진 않지. 하지만 비만이고 타투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피어싱도 했고 계약직이고 퀴어고 기타 등등. 지방에서는 저를 많이 말할 기회도 없었지만, 서울에서는 그 기회를 얻는 대신 그만큼 혐오 당하는 거죠. 계급주의적인 차별이기도 하고요.

음, 제가 잘 설명했을까요. 지방에서 살 때는 제가 정씨 집안의 비만인 장녀일 때는 비만이라서 연애 시장에서 탈락했다는 소리를 못 들었거든요?


라일라

아, 이런 거군요. 지방에서는 결혼이 내가 결혼하고 말고가 아니라 저 집 딸이 결혼하고 말고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아직 남아 있잖아요. 부모가 우리 딸이 아직 결혼을 못 했는데 좋은 혼처를 구한다고 하면 주변에서 아는 사람이 있다고 소개가 들어오는 거죠. 비만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정씨 집안의 딸인 게 훨씬 중요한 요소인 거고. 그런데 서울에 오는 순간 부모와 분리되는 객체이기 때문에 개인이 훨씬 두드러져 보이는 거 아닐까요.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뚱뚱해서 그렇구나, 직업이 없어서 그렇구나.


정한새
아, 맞아요. 훌륭한 사회자십니다. 그래서 저를 정밀한 눈금에 따라서 잰다고 느껴졌고 그 결과 정밀한 혐오의 대상이 됐다고 느꼈고 그래서 더 정밀하게 위협받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물론 지방에 살 때는 정밀함 자체를 느끼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죠.
 

라일라 
두 분 모두 서울이 목적이었던 적이 없다고 말씀해주셨지만 여전히 서울로 떠나는 사람이 있는 게 현실입니다. 한새 님은 실제로 떠나셨고 조재 님도 떠나셨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럼에도 두 분이 계속 지방에 대한 글을 쓰시고 이렇게 한 해의 마무리 인터뷰까지 하신다는 건 우리가 살아왔던 지방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두 분은 어쨌든 우리가 살아왔던 도시가 망하거나 사라지지 않고 더 나은 곳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이런 활동을 하시는 것 같거든요. 
그래서 조재 님에게 궁금했던 게, 글에 강원도에 계시는 많은 분과 인터뷰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글이 아니라 사람의 삶으로 만나면서 이곳을 미워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하셨어요. 혹시 인터뷰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조재

인터뷰를 하기 전에 제가 생각하는 춘천은 좁은 곳이었어요. 지도를 기준으로 봤을 때 봉의산이 있고 주요 생활 반경이었던 온의동과 금화동 일대가 제가 아는 춘천이었던 거죠.

그런데 인터뷰를 하면서는 동 지역 뿐 아니라 무슨 면, 무슨 리 이런 곳을 많이 다니게 됐어요. 저는 춘천에 이렇게 많은 리가 있는 줄 몰랐고, 어르신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지도를 자주 보게 된 거예요. 왜냐하면 인터뷰한 사람이 말한 지역이 어딘지 알아야 제가 정리할 수 있거든요. 특히 댐 이야기할 때 댐에서 어디를 건너가지고 강을 건너면 무슨 리였다, 이런 걸 봐야 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입체적으로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학술적인 배경을 찾아보고, 역사적인 기록을 찾고 하다 보니 춘천이라는 지역 자체가 복합적인 경험으로 다가온 거죠.

춘천에서 살아온 사람에게는 이러한 생활사가 있고, 이런 모습으로 살았는데 환경이 변하면서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고 그래서 이 지역만의 어떠한 특징이 있었는지 알게 되는 거예요. 춘천 구석구석을 자세하게 알게 되고 여기 살았던 사람이 이렇게 살았구나, 내 부모도 여기에서 이렇게 살았겠구나, 나라는 개인이 어디서 뚝 떨어진 게 아니고 이런 흐름 안에서 태어나 나도 여기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내 또래와 무언가를 공유하고 있구나. 앞으로 내가 여기서 계속 산다면,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 춘천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했죠.
 
라일라
사실 우리가 사는 지역에 대해 평면적으로 아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조재 님은 춘천을 자세히 알게 되고 깊이 있게 보면서 입체적으로 느끼게 되셨고, 내가 알던 춘천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애정이 생기신 것 같습니다.





* 다음 주 월요일에 3부가 올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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