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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인 Feb 06. 2023

궁리

혼자만의 시간 



몇 해 전 강원도 산골에 큰 불이 났다.

어떤 할머니가 밭둑을 태우다가 산에까지 번진 화재였다.

그 산불은 꽤 커서 군인들까지 동원되었다.

군과 경찰이 방화범을 찾기 위해 탐문 조사를 벌였는데

마을 사람들은 가진 것 없는 할머니를 보호할 생각으로

실성한 노인이라고 둘러댔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불을 낸 할머니도 맞장구를 쳐 몇 해를 실성한 사람 행세를 했다.

근데 몇 년간 실성한 척 살아온 할머니의 정신이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성태의 산문집에 실린 이러한 내용의 글을 읽으면서

순간 방구 소리처럼 풉! 웃음이 터졌다.

그 웃음은 뭔가 모를 씁쓸함을 남겼다.

전성태의 말처럼 할머니의 마음속에 있었을 숨 막히는 공포와 고독에

그만 자신을 내주고 말았을 거란 생각을 하니 말이다.



설을 쇠고 온 후 원인 모를 병으로 누워 지낸 지 오래 되었다.

온몸을 파고드는 오한과 식은땀 몸살 증세로 힘들다.

코로나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일었다.

같은 차로 오갔던 남편은 아무 이상 없는 걸 보면 감기몸살인가 싶다가도

시일이 가도 개운해지지 않은 걸 보면 코로나 같기도 했다.

오늘은 좀 나아지는가 싶다가도

내일이면 또 오한과 가슴 답답함이 일고...


실은 나는 코로나 일지 모른다는 핑계를 대고 이층 서재로 격리를 자청했다.

아니 핑계만은 아니다.

행여, 사무실까지 닫아야 할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한 대비이기도 했다.

전기장판, 이불, 간단한 화장품, 생수, 속옷을 챙겨 올라왔다.


그렇게 해서 책밖에 없는 이층에서 책만 보며 지내고 있다.

그러는 동안 내겐 밤낮이 시간개념이 입맛이 사라졌다.

포식하듯 책을 집어삼키고, 졸리면 잠깐 자고 또 책에 취하고...

몸살약을 먹기 위해 삼시세끼 밥은 챙겨 먹는다.

찬통에 찰떡처럼 뭉쳐져 있는 밥을 몇 숟가락 떠서 따뜻한 물에 말아

김치 한 조각씩 얹어 한 끼를 때운다.


마치 결혼 전 홀로 자취하던 생활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때는 밥 대신 생라면을 자잘한 글씨처럼 잘게 부수어놓고

사오백 원에 산 헌 소설책을 읽으면서 참새처럼 오래오래 주워 먹었다.

월급에서 방세와 생활비를 빼면 남는 것 없는 가난한 생활이었지만

누구의 간섭이나 살림해야 하는 책무 없이 자유로웠던,

긴 지루함 속에서도 책은 놓지 않았던 그 시간.

코로나 핑계로 그 시절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다.


텔레비전 시청을 조금만 줄여도

가족관계의 얽매임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살림에서 조금만 게을러져도

자잘한 몸 꾸밈을 조금만 없애도

이렇게 시간이 풍성해지는 것을.


남편이 마스크를 끼고 이층에 올라온다.

처벅처벅 계단을 밟아 올라오는 소리,

삑삑삑삑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

드르륵 중문 여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누워 앓는 척을 한다.

"좀 괜찮아?"

"응 좀 나아진 것 같은데, 아직 한기와 두통이 있네."

힘없는 표정으로 힘없이 대답을 한다.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올라와 묻고 내려간다.

마치 살았나 죽었나 확인하러 오는 사람처럼.

먹을 것이라도 사서 밀어 넣어줄 일이지 맨날 빈 손으로 말이다.


그래도 전업주부로서 일말의 염치를 느낀 나는

남편이 출근하고 없는 사이 일층에 내려간다.

우렁각시 출두요!

청소기와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갠다.

간단한 반찬과 밥을 지어놓고 올라온다.


아침에 일어나 개운해진 듯했던 몸이 다시 이상해진다.

마른기침이 나고 목이 칼칼하다.

진짜로 아픈 건지

진짜처럼 행세하려다 보니 아픈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글자를 많이 먹어 배는 두둑해졌는데

일주일만 이런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한이 없을 듯한데

근데 근데

진짜 코로나면 어쩌지?

자꾸만 몸이 안 좋아지는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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