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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인 Dec 23. 2022

서브, 리시브



남편은 탁구를 배우기 시작한 지 일 년이 되었다. 운동신경이 발달해서인지 십 년 넘게 배운 초로의 여인들과 한 판 겨룬다고 한다. 그녀들은 처음엔 몇 점 내주고 치다가 요즘 들어서는 그 선심을 걷어가 버렸단다. 새내기가 벌써 자신들과 견주는 게 기분 상했는지 차츰 거리를 둔다고 한다.


열대야를 피해 신천변을 거닐었다. 오늘도 어김없는 대화가 오갔다. 남편이 먼저 탁구 얘기를 꺼냈다. 초로의 여인들은 유연성과 인내심이 강해서 웬만한 서브는 잘 받아내고 잘 넘긴다, 하지만 강한 자르기 서브나 꺾기 서브를 넣으면 그만 당황하고 만다는 것이다. 난 그의 고조된 기분을 맞추려 맞장구쳤다.


“그러니까 속도가 중요하다는 거지?”


“그럼! 탁구를 잘 치고 못 치고는 시간이 아니라 속도지. 그저 시간 보내기 위한 탁구라면 나도 가볍게 받아내고 유연하게 넘겨줄 수 있지.”


“즐기면 되지. 승부가 중요한가?”


한참 들어주다가 우쭐해 있는 그의 기세를 살짝 눌렀다. 당장은 앞설지 모르지만 긴 시간 안에서만 터득되는 것들은 절대로 따라갈 수 없다고. 그건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문학에서도 한 장르만 붙잡고 공부하듯 직진하면 생각하는 목표지점에 더 빨리 닿는다. 하지만 성근 나무만 있어 무성한 숲은 이루지 못한다. 힘이 잔뜩 들어간 채 짧은 공만 탁탁 치는 당신은 잔기술만 부리려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라고 말했다.


그는 문학을 탁구로 해석할 줄 모르는지 묵묵부답이었다. 상대의 말에 침묵하는 건, 사유며 지식이 짧거나 대꾸할 가치가 없는 경우일 거다. 가정의 기둥으로 사회의 역군으로 긴 세월 살아온 자기에게 조언을 하는 내가 가소로웠는지도. 아니 무슨 말이건 문학과 버무리는 내게 지쳤을 수도 있다.


난 언제 어디서나 내 뼛속까지 뿌리내린 문학 얘기를 한다. 텔레비전도 문학을 위해서 본다. 식탁에 앉아서도 밤 산책길에서도 아이들한테 가는 열차 안에서도 문학을 더듬는다. 그래서 무슨 얘기든 문학적으로 해석해 듣는다.


내게 있어 문학은 지난한 삶의 도피처이다. 현실의 외피가 거무튀튀해지면 그 더께를 벗겨주는 세정제이기도 하다. 더 깊이 들어가면 무지개가 드리운 너른 초원이다. 목마름을 적셔 줄 오아시스가 있고 심상을 걸어 둘 야자수 몇 그루도 있다. 나는 그곳에 들어가 세상사에 얼룩진 마음을 말갛게 씻는다.


남편에게 탁구는 삶의 치열한 현장인 것 같다. 밤을 낮 삼아 기계를 고치고 휴일도 없이 뛰어다니며 영업을 했던 날들. 거칠고 짧은 말 한마디가 자신을 튕겨내고 때론 무시를 당했지만 돈 벌기 위해 타협하며 순하게 받아쳤던 나날들. 내색하지 않던 내상이 끝내 그를 쓰러뜨리자 남편은 예전 모습을 잃어버렸다.


남편에게 탁구는 위축돼 버린 삶을 재생시키는 연습장이다. 날 것 그대로의 활기찬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랄까. 탁탁 서브를 넣으면 탁탁 받아쳐 줄 상대가 있는 곳이다. 엎어지고 넘어지고 다투면서도 손 내밀던 예전 놀이터처럼.


에덴동산을 꿈꾸는 나와, 효용을 중시하는 남편. 그는 거친 현장이었지만 튕겨오고 튕겨내는 생생함을 좋아했다. 내게 현실은 여전히 피폐한 현장이라서 문학 안의 고요를 좋아했다. 그는 실용성 없는 내 서브를 무시했고, 나는 영혼 없는 그의 팍팍한 서브를 외면했다. 우린 오래도록 각자의 서브 방식만 꾸준히 연마해 왔다.


우리는 많은 것이 달랐다. 이것이 예쁘다고 하면 저것이 예쁘다고 했고, 이게 크다고 하면 저게 더 크다고 했다. 내가 아이들을 야단치면 남편은 나를 책망했고, 남편이 아이들을 야단치면 나는 아이들을 감쌌다. 나는 동네 골목길 왼쪽으로만 다녔고 남편은 오른쪽이 빠르다며 그 길만 고집했다.


이제 초로의 문턱이 우리 코앞에 놓였다. 산더미처럼 쌓이기만 했던 일들도 주먹 안에 든 모래처럼 스르르 빠져나가고 있다. 자식들도 제 짝 찾느라 바쁘다. 남편은 텅 빈 거실에 혼자 앉아 티브이 영상을 좇는다. 나는 여전히 서재에서 책 숲을 누빈다.


남편이 적적한지 부드러운 서브처럼 퉁탁퉁탁 카톡을 보내온다. 공원에 갈까, 아니면 강변을 돌고 올까 묻는다. 나는 이 서브를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몇 시간만 기다려 달라고 답장한다. 남편은 그 시간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저 부드러움이 언제 강한 서브로 돌변할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우린 늙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서로가 치는 공의 안면을 보기 시작했다. 겉면만 보며 내리치고 깎아 휘돌렸던 서브 방식을 내려놓았다. 힘을 빼니 공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길게 오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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