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8.13. 뮤지컬 <피터팬> 리뷰
뮤지컬 <피터팬>의 브로드웨이 공연 팀이 전국 투어를 하고 있습니다. 저희 동네에도 오게 되어 보러 갔는데요. 제가 <피터팬>을 보러 간다고 하자 친구가 "아, 나는 피터팬 싫어. 자라지 않으려 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지겨워"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공연을 보러 갔을 때, 평일 저녁이긴 해도 생각보다 객석이 꽤 비어 있어서 놀랐어요.
공연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제가 보러 가게 된 것도 다소 갑작스러운 결정이었는데요. 저도 원래는 관심 없이 있다가, 요즘 핫한 아메리카원주민 극작가 '라리사 패스트호스'(Larissa Fasthorse)가 이번 버전의 대본 각색을 맡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러 가기로 한 거였거든요. 라리사 자신이 인스타그램으로 열렬하게 홍보하고 있어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피터팬 이야기를 잘 아시나요? 피터팬은 디즈니 만화를 통해 많이 알려진 것 같고, 그래서 주요 인물들인 피터와 웬디, 후크선장, 악어, 팅커벨 정도만 잘 알려져 있고 스토리라인까지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실은 저도 석사 시절 피터팬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었는데도 기억이 잘 안 나요.
뮤지컬 <피터팬>은 처음 봤는데, 첫 장면이 왜 이렇게 익숙하지 싶어 생각해 보니 얼마 전 <피터팬 고우즈 롱>이라는 연극을 봤기 때문이었습니다. <어 플레이 댓 고우즈 롱>이라는, 최근 가장 핫했던 브로드웨이의 새로운 소극(farce: 대학로의 <라이어>로 대표되는, 성인용 희극 장르) 작품의 속편이었습니다. <피터팬 고우즈 롱>은 <피터팬> 공연을 올리는 과정에서 자꾸 실수가 발생한다는 이야기 틀 안에서, 숨 쉴 틈 없이 일차원적이거나 성인용 유머를 던져 관객을 웃겼습니다. 이번 관극을 통해 그 무대가 뮤지컬 <피터팬>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뮤지컬 <피터팬>은 원래 가족용 뮤지컬로 만들어진 데다, 여기저기 개그코드를 많이 섞었는데 그게 소극의 자극적인 유머에 미치지 못하는 바람에, <피터팬 고우즈 롱>과 직접적으로 비교되면서 상당히 지루하게 느껴졌습니다.
다음 장면들로 이어지면서 그래도 너무 지루하지 않게 따라갈 수 있었는데요. 그러면서 한국에서 대학원에 다닐 때 읽었던 원작, J.M. 배리의 <피터팬, 또는 자라지 않는 아이>가 생각났습니다. 당시 지도교수님이 연극 <피터팬>을 연구 중이셨기 때문에 <피터팬>의 다양한 버전과 속편들, 그리고 연말에 영국에서 인기를 끄는 공연 장르 할레퀴네이드로 각광받기까지의 여정을 꼼꼼히 공부했었습니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J.M. 배리의 또 다른 유명작 <훌륭한 크라이턴>에서 더 직접적으로 그려지듯, 연극 <피터팬> 또한 영국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코멘터리였던 기억이 납니다. 등장인물들은 정돈되고 안정적인 영국의 집 안에서 살다가, 피터팬을 만나면서 밖의 세상으로 날아가 무정부적인 숲 속에서 잠깐 지내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사는, 사회의 가장자리에 놓인 아이들('길 잃은 아이들')이, 이끌어줄 사람이나 사회구조 없이 되는대로 즐기며 싸우며 사는 삶을 보게 됩니다. 후크 선장 같은 위험한 사기꾼에 무방비로 노출된 그런 삶이죠. 그리고 다시 안정적인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숲에서 찾은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요. 여기서 성별의 차이와 역할에 대한 강조가 이루어집니다. 아이들은 이야기를 들려줄, 지혜로운 존재를 필요로 하며, 여자가 없는 환경에서 웬디가 오자 '엄마'로 추대합니다. 벌써 단순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오지 않나요? 실제로 J.M. 배리는 생전에 <피터팬>의 디즈니 애니메이션화 제안을 거절했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피터팬>이 지닌 사회비판적 요소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기대했던 라리사 패스트호스는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개인적으로 조금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아쉽게도 아직 라리사 패스트호스의 작품을 읽거나 본 적이 없는데요. 최근 그의 <땡스기빙 연극>이라는 작품이 브로드웨이에 올라가며 화제가 되었다는 것, 그리고 요즘 아메리카원주민 대상 연극 프로그램이나 극작을 적극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학회에서 한 번 실제로 본 적이 있고요.
원작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이번 뮤지컬에서 준 변화는 우선 '타이거 릴리'로 대표되는, 원래 숲에 살던 또 다른 아이들 무리의 존재가 많이 강조되었다는 건데요. 후크선장을 식민세력으로, 타이거 릴리를 원주민으로 비유하여 두 세력 간 다툼이 진지하게 그려진 짧은 순간이 두 번 정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크 무리를 아일랜드 사투리를 쓰는 모습으로 그렸어요. (사실 영국 억양을 표현하려 한 것일 수도 있는데 모르겠어요... 미국인들은 다른 억양 흉내를 잘 못 내는 편입니다..) 또 웬디와 타이거 릴리가 내용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상대적으로 체격부터 피터의 존재감이 많이 약했어요. 한편 웬디에 흑인 배우를, 타이거 릴리에 동양계 배우를 캐스팅하여 다양성을 추구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브로드웨이 팀인데도 주연인 피터가 너무 약한 듯싶어 보니, 실제로 배우가 현재 17살의 고등학생이었습니다.
이렇듯 나름 변화를 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데요. 사실 개인적으로 요즘 뮤지컬을 보면 자주 촌스럽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피터팬>도 마찬가지였어요.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뮤지컬은 연극에 비해 변화를 주기 너무 어려워서 그렇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한 작품을 그릴 때 노래와 안무, 무대와 동선과 대사가 모두 맞아 들어가야 하니, 같은 대본으로 수없이 다른 무대와 호흡을 연출할 수 있는 연극보다는 새로운 시도가 훨씬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최근작이 아닌 이상은, 어딘지 무대나 안무, 노래의 면에서 조금 올드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줄 수 있는 변화라곤 이렇듯 약간의 각색을 추가하는 것인데, 뮤지컬은 워낙 대본보다도 무대가 이끌어가는 장르다 보니 그 한계가 큰 것 같았고요. 그리고 나름 지금 가장 유명한 극작가를 섭외해 놓고 그의 이름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지 않았다는 것도 의문스러웠습니다. 아마 연극인이 아니면 잘 모를 사람이라서 그랬을까요.
브로드웨이 뮤지컬이라고 하면 자고로 놀라운 무대 연출이죠. 날아다니는 것 연출만큼은 공들인 티가 났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를, 와이어가 전혀 보이지 않으면서도 움직임이 자유로운 그 기술이 정말 감탄스러웠습니다. 같은 기술을 사용한 것 같은, 작은 빛으로 표현되는 팅커벨도 신기했고요.
그리고 디즈니의 영향력에 대해서도 생각했어요. 피터 팬과 후크선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초록과 빨강 재킷을 각각 입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공연장을 찾은 수많은 아이들이 팅커벨로 드레스업 하고 나타났고요.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이젠 고전이 되었는데, 그 영향력이 아직도 참 크구나 싶었습니다.
얼마 전 본 뮤지컬 <라이온 킹>도 생각났어요. 다른 모든 캐릭터는 상상력을 돋우는 기발한 인형극 요소를 사용한 것에 반해 티몬과 품바는 디즈니 캐릭터를 그대로 재현해 낸 것이 이질감을 준다고 느꼈었습니다.
문득 '촌스러움'이란 그저 내 입장에서 느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본 것들이 지금도 아이들에게 똑같이 보이고 있다면 새로운 컨텐츠에 대한 고민 부족이 아닐까 했었는데, 어쩌면 디즈니가 그만큼 친숙하고 쉬운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거구나 싶었습니다. 사실 박사과정을 마치기 전까지는 공연들이 제가 던지고 있는 질문들을 함께 고민해주지 않았을 때 아쉬움을 많이 느꼈었는데요. 공부에 마침표를 찍고 나니 제 질문들은 제게만 의미 있을 뿐, 각자의 공연은 각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많이 들어오는 요즘입니다. 특히 아이들과 같은 초심자나 일반인들에게 쉽게 다가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많이 느낍니다. 그러니, 지금의 틀 안에서 라리사 패스트호스가 준 각색도 그 나름의 큰 의미를 지니지 않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변화를 만들고 있다고요.
하지만 빈 객석과, 이날 유난히 당황스러웠던 관객 특성을 생각해 봤을 때, 분명히 지금의 공연이 많은 사람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고 있지는 못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얼마 전 엘에이에서 보았던 <A Strange Loop>이라는, 최근작 뮤지컬과는 상당히 다른 분위기였어요. 연극산업은 점점 줄어드는 관객으로 미래가 참 불투명한데요. 나름대로 마지막 희망인 뮤지컬도 힘을 잃고 있는 건 아닌가, 연극인으로서 기우를 또 한 번 느끼는 관극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