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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서브스턴스>의 바디 호러

할리우드가 쏘아 올린 큰 공

by 로리

<더 서브스턴스>가 요즘 유행이다. 최근에 주연을 맡은 데미 무어가 골든 글로브 상을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영화관에서 지난 9월에 개봉했었다고 하는데 모르고 있다가 최근 OTT에 열리면서 여기저기 회자되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바디 호러' 장르의 공포영화라는데 바디 호러가 어떤 것인지 몰라 호기심에 보게 됐다.


영화는 몬스터나 고어물이라고 할 수 있을, 유혈이 낭자한 신체 상해 장면이 가득 담긴 장르였다. 앤디 워홀이 떠오르는 통통 튀는 색감의 사용과 마치 ASMR럼 귀에 때려 박는 찌걱거리는 효과음이 시청자의 감각을 파고들어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몸에 찝찝한 잔상을 남긴다. 나는 호러에 있어서 귀신 말고는 크게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라 (대신 귀신을 과도하게 무서워한다) 그다지 공포영화라는 생각 없이 그저 몸에 남은 찝찝함과 함께 감상을 마쳤다. 내겐 자극적인 장면들보다 영화가 거울처럼 비춰준 사회의 단상이 더 무섭게 다가왔다.


The_Substance_poster.jpg <더 서브스턴스> 포스터

줄거리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스포 주의),


한때 큰 인기를 누리던 배우 엘리자베스(데미 무어)는 나이가 들며 이름을 걸고 오래 유지해 온 고정 프로그램에서 잘릴 위기에 처한다. 몸을 사용하는 운동 프로그램이기에 기획자가 그의 역할을 더 젊고 매력적인 인물로 대체하려는 것이다. 불안에 떨던 와중 엘리자베스는 우연히 '더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알게 된다. 다소 비밀스럽고 검증되지 않은 느낌의 이 약물은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거라는 '더 나은 나'를 내 안에서 끌어내준다고 한다. 아직 테스트 단계인 듯 정보도 많지 않고 사용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 보이는데, 엘리자베스는 무작정 약물을 사용하고 본다. 그렇게 '더 서브스턴스'라는 약물 주입 즉시 몸에서는 마치 세포분열 같은 과정이 일어나며 자신의 몸 안에서 정말로 새로운 다른 몸이 튀어나온다. 더 젊고 예쁜 모습이라는 설정이다.


다소 식상해 보일 수 있는 이 설정에서 특이한 점은 한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몸과 새로운 몸으로 하나의 자아가 사용하는 신체가 두 개가 되는 것, 그리고 일주일 간격으로 의식이 두 몸 사이를 오가야만 한다는 조건이다. 더 매력적인 새로운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원래의 몸으로부터 에너지를 꾸준히 공급받아야 하는데, 의식이 원래의 몸에서도 같은 시간을 보내야만 이 에너지가 좋은 품질로 원활히 공급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이 몸 변경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몸을 교체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몸은 '수'라는 이름으로 원래의 자아가 하던 프로그램을 대체하고 사랑받는 신인으로 급부상한다. 젊음과 인기를 누림과 동시에 늘어나는 일을 감당하다 보니 '수'는 자꾸만 일주일을 넘겨 새 몸에 머물게 되고, 이렇게 정해진 기한을 넘길 때마다 원래의 몸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른다. 몸의 부분들이 한순간 완전히 늙어버리는 것이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때마다 점점 더 흉측해지고 불편한 모습을 마주하는 엘리자베스는 돌아올 때마다 분노하며 폭식과 어지르기 등 온갖 스트레스를 통제 없이 분출하고 두 몸 사이의 상호 혐오는 점점 더 심해진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배우에게 있어 큰 영광이라고 여겨지는 할리우드 연말 행사 진행을 '수'가 맡게 되는 것에 있다. 워낙 중요한 행사이기에 '수'는 젊은 몸에 오래 머무르며 바쁜 준비과정을 소화한다. 그러나 행사 당일 원래의 몸에서 뽑을 대로 뽑아 쓰던 에너지가 똑 떨어지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원래의 몸으로 돌아간 엘리자베스는 이제 완전히 괴물처럼 변해버린 몸을 보며 큰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고, 즉시 '더 서브스턴스'에 전화해 사용을 종료하고 싶다고 말한다. 회사는 종료 약물을 보내주고, 새 몸에 그 약물을 주입하던 엘리자베스는 순간 꿈에 그리던 연말 행사가 코앞에 와있음을 떠올리며 망설이다 '수'를 다시 깨운다. 가이드를 벗어난 엘리자베스의 약물 사용에 '수'와 엘리자베스는 처음으로 동시에 깨어나게 되고,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죽이려던 걸 알아챈 '수'는 이성을 잃고 분노하여 엘리자베스를 폭행해 인사불성으로 만든다.


이후 '수'는 서둘러 행사장으로 향하는데, 한계에 다다른 몸이 점차 부서지기 시작한다. 손톱이 빠지고, 이가 빠지고, 코피가 흐르며 도저히 행사를 진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간다. 집으로 허겁지겁 달려간 ''는 처음 새로운 몸('수')을 만들 때 사용했던 약물을 자신에게 다시 주입한다. 이 약에는 사용 즉시 잔여 약물을 버리라고 쓰여 있었다. 약물은 부작용을 일으키며 과도한 세포분열을 일으키고, 이번에 ''의 몸에서 튀어나온 몸은 형체를 알 수 없는 여러 개의 얼굴과 팔, 다리가 여기저기 기형적으로 붙은 괴물의 모습이다. 이 괴물은 포기하지 못하고 행사장으로 달려가 무대에 오르는데, 경악한 사람들의 공격에 멈추지 않는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세포 분열이 계속 일어나는 걸까... 피의 분수가 온 극장을 덮을 정도로 계속 나온다) 끝까지 스타로서의 영광을 포기하지 못한 모습으로 그만 터지고 녹아 사라진다.




<더 서브스턴스> 포스터


영화를 보며 우선 든 생각은 시의적이라는 것이었다. 마약과 인터넷 중독 등 자본주의가 끊임없이 극대화시키는 다양한 자극들, 그리고 그에 인간이 의존하게 되는 문제는 꾸준히 제기되어 왔지만 요즘 특히 더한 것 같다. '서브스턴스(substance)'는 영어로 넓은 의미의 다양한 약물을 포함하는 개념인데, 흔히 마약을 지칭한다. 또 한국의 쌍꺼풀 수술만큼이나 미국에서 가장 보편적인 성형 수술은 보톡스와 가슴 수술인데, 보톡스 시술 또한 약물 주입으로 진행된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서브스턴스'는 마약으로도, 성형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영화는 두 가지 모두에 적용되는 상황을 다루고 있다. 신체 변형을 통한 아름다움의 추구, 그리고 어떠한 '더 나은' 상태의 일정한 경험 이후엔 추락하듯 돌아와야 하는 원래의 상태. '더 나은' 버전에 손이 닿는 순간 그 어떤 괜찮은 현 상황도 불만족스러워진다. 이를 유지하기 위해선 꾸준한 약물 공급이 필요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현실과의 괴리는 커지고, 약물의 공급도 보장받기 어려우니 마치 답이 정해진, 불행을 향한 경주를 보는 것 같다. '더 서브스턴스'를 알기 전 엘리자베스는 이미 충분히 인기도 아름다움도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몸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아무 문제없다. 나는 이게 아주 중요한 설정이라고 생각했다.


'더 나은 나'란 도대체 뭘까. 다른 무언가가 지금의 나보다 무조건적으로 더 낫다는 개념을 들여오는 순간 지금의 나 안에서 충분함을 느낄 수 있을까. 내가 가장 무섭게 느낀 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처음 시놉시스를 읽었을 땐 '더 나은 나'가 너무 추상적인 개념이라 영화가 어떤 내용을 다룰지 전혀 예상이 가지 않았었다. 더 성숙한? 더 현명한? 더 편안한 나일까? 아니면 자신의 꿈을 이룬 이후의 모습이란 말일까? 엘리자베스에게서 새로운 몸이 튀어나오는 순간 그 몸이 어떻게 현재의 모습과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을 연출할지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수'는 완전히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둘 다 압도적인 인기와 성공을 꿈꾼다는 것 외엔 이들이 같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그 어떤 시도도 없었다.


영화도 미디어도 아닌 공연을 전공하는 입장에서, '몸'을 가장 중요한 매체로 봐온 시선에서, 이건 너무 말도 안 되는 설정이었다. 완전히 다른 몸 두 개라면, 그건 더 나은 나일 수 없다. 그냥 다른 사람인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몸과 불가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말 무서웠던 건 내가 너무도 괴리감 있게 느낀 이 장면에 대해 영화가 그 어떠한 설명도 서사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영화는 애초에 사실성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으며 (몬스터의 등장과 희귀 약물의 사용에 공상과학 장르로 분류되기도 한다), 엘리자베스에게 관객이 이입할 수 있는 요소를 제공하지도 않는다. 심리적 서사가 아예 빠지고 대신 상황의 제시로만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래서 영화는 이미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어떠한 전제들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더 젊고 예쁜 다른 몸을 가지고 싶다는 엘리자베스의 욕구가 설명이 필요 없는 당연한 사실이어야 관객이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개인성이나 섬세함이 배제된, 우화와도 같은 이 영화가 보여준 사회의 단상은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것과 완전히 다른 신체를 당연하게 원할만큼 자아와 몸을 분리하여 인식하고 있으며, 그만큼 스스로가 여기는 신체의 가치가 너무도 낮아져 있다는 것이었다. 언제든 버리고 다른 신체와 연결할 수 있기에. (신체의 가치가 낮아지면 자아의 가치도 낮아진다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이처럼 <더 서브스턴스>는 사회의 거울처럼 작용하며 비판적인 시선을 정면으로 드러낸다. 엘리자베스와 '수'는 인기와 성공을 누릴만한 자원을 충분히 가졌으면서도 막상 자본을 가지고 있는 지저분하고 무례한 나이 든 백인 남자들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며 불행해진다. 그들의 투자 결정에 미래가 달려 있으니, 백인 남성이 요구하는 젊음과 섹스어필을 집착적으로 추구한다. 그렇다면 '더 나은' 것은 다른 게 아니라 '자본주의 산업에서 더 잘 팔리는'이라는 뜻인 걸까? 누구 기준으로 '더 나은' 것일까? '수'라고 해서 더 행복하지는 않아 보였다.


영화는 나이 든 백인 기획의 모습을 더럽고 혐오스럽게 클로즈업해 표현하고, 오디션에서는 이들이 여자 지원자의 가슴을 중점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실 영화 외적으로도, 처음 엘리자베스의 몸에서 나체의 '수'가 등장한 순간, 같이 보던 친구들도, 나중에 <더 서브스턴스>에 대해 이야기한 친구들도, 우선 분홍색 유두에 대해 코멘트했다. 커다란 몸에서 유두의 색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올 만큼 언제부터 그렇게 신체에서 평소엔 보이지도 않는 곳의 모양과 디테일이 중요했던 걸까? 더 나은 나란 결국 분홍 가슴과 힙업을 장착하면 가지게 되는 것이었던가. (이쯤 되면 연출할 때 유두의 색에 특별히 신경 써서 메이크업했을 거란 생각도 해본다.) 클라이맥스에서 괴물이 된 엘리자베스가 무대 중앙에 서 숨죽인 관객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 꿀렁이며 힘겹게 머리에 붙은 입에서 뱉어낸 것은 가슴이었다. 그 '탱탱한' 가슴은 바닥에 떨어지며 데구르르, 굴렀다. 마치 '자, 너희가 원하던 것을 마련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찬가지로 수의 몸이 무너질 때 손톱이 빠지고 이가 빠지는 모습에서 나는 현재의 네일아트와 라미네이트 문화가 떠올랐다. 뭐든 적당히는 할 수도 있고 필요한 때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손톱과 이는 어떻게 보면 생활의 편의와 건강한 삶에 있어 너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에, 지나치게 길게 만들어 손을 사용할 수 없게 하는 네일아트나 모양을 위해 원래의 이를 깎아 없애고 연약한 소재로 갈아 끼우는 라미네이트가 요즘 보편화된 모습을 보며 기괴함을 느끼던 와중이었다.


영화의 중요한 장치인 자유 의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는 '더 나은' 것을 당연히 욕망한다고 하는데, 그 욕망은 어디부터 온전히 나의 것이었을까? 개인의 자유란, 자본주의에서 적극적으로 판매되는 가치다. 일례로 기술의 발전은 늘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는 것처럼 포장되곤 한다. 그러나 정말로 우리는 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있을까. 무한한 새로운 가능성을 주는 스마트폰의 일상화는 언뜻 각자가 사용의 정도와 농도를 선택하는 듯해 보이지만 실로 중독, 집착, 의존과 깊이 연결되어있지는 않은가. 강제성 없이 개인의 의지로 균형을 맞추도록 설계된 '더 서브스턴스'는 도락의 공급이 용이해졌을 때 사용자가 얼마나 쉽게 파멸의 길로 빠지게 되는지 보여준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시국이 시국인지라 잠시 한국의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현재 대통령의 영부인과 관련한 비리 문제는 당선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하지만 그런 기사들이 뜰 때마다 댓글을 보며 섬뜩함을 느꼈었다. 여러 다른 코멘트들 와중에도 꼭 외모에 대한 발언이 꽤나 큰 반응을 얻으며 끼어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예쁘긴 정말 예쁘네"와 같은 말들. 그걸 보며 느꼈던 건 우리 사회의 이미지 소비 습관이 상당히 극단적이라는 것이었다. 타인의 외모가 문맥과 상관없이 어찌나 먼저 눈에 들어오고 어찌나 금방 해석되어 버리는지, 그에 대해 코멘트를 안 할 수가 없구나. 그만큼 정보 전달에 있어 이미지가 큰 자극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이었다.


'미디어 독해력'이라는 말이 있는데 미디어 접근성이 뛰어난 현대 사회에서 시청자들이 컨텐츠를 소비하는 깊이나 전문성, 해석력 또한 상당히 높아졌다는 말이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디어 독해력이 좋다고 한다. 그런데 '독해력'이라는 개념은 또한 어떠한 방식이나 방향성 또한 내포한다. 독해를 할 때에는 이런저런 패러다임이 사용되고 그래서 독해의 갈래는 여러 가지가 있게 마련이다. 지금의 사회는 외모에 대한 암묵적 기준을 가지고 그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평가를 내리는 형태의 독해 습관이 자리하고 있는 듯하다.


비단 우리나라의 문제도, 개인의 수준 문제도 아니라고 본다. 할리우드로부터 만들어지고 전 세계로 전파된 이미지 소비 시스템이다. 영화사를 보면 할리우드에서 어떻게 전략적으로 미세관상학을 사용하여 여성의 얼굴과 신체를 영상으로 팔리는 가치로 만들지 고민하고 상품화하였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심지어는 D. W. 그리피스라고 하는, 일명 할리우드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한 개인의 의도적인 영화 언어 형성에 기반한 것이다. (여러 방면에서 상당히 문제적 인물이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할리우드지만 전체 영화사 안에서 보았을 때 할리우드는 다른 나라들과 비교되는 굉장히 튀는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출생지인 프랑스의 영상 이미지들과 비교해봐도 할리우드가 상당히 다른 느낌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만큼 지금의 이미지 소비 방식이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사회적으로 키워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스타의 이름으로 장식된 할리우드의 '명예의 거리(Walk of Fame)'에 엘리자베스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얼굴의 조각이 다시금 그 이름으로 기어가 그 위에서 마지막을 맞는 영화의 구성은 이 미친 영상 산업과 시각적 아름다움의 노예가 된 불행의 뿌리에 할리우드가 있음을 지적한다. 불친절하고 이입을 방해하는 영화의 구성이 비판적 자아성찰을 얼마나 성공적으로 유도했을지 궁금하다. 이 영화는 스스로 문제시하고 있는 이 고어한 자극이 없었다면 이만큼 성공할 수 있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친구들과 나는 소파에 늘어지며 한 마디를 했다.

"그냥 좀 늙자..."


<더 서브스턴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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