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든일은잘될꺼야 Dec 18. 2024

법이란 이름 아래 감춰진 침묵의 억압

법정

차이타니아 타무하네 감독의 데뷔작 '법정'은 인도의 사법제도를 통해 사회적 불평등과 계층적 갈등을 조명한 수작이다. 이 영화는 전통적인 인도영화의 극적인 서사나 감정적인 클라이맥스를 배제한 대신, 다큐멘터리처럼 냉철한 시선을 유지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현대 인도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합리를 성찰하도록 이끈다. 특히, 법이라는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시스템이 어떻게 가난한 계층과 소외된 이들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기능하는지를 섬세하고 날카롭게 드러낸다.


법의 구조적 폭력: 공정함의 환상과 계층적 현실

'법정'은 법이 계급 사회의 지배 구조를 유지하기 위한 도구임을 보여준다. 영화는 무명의 활동가이자 민속 가수인 나리안 캄블리의 체포와 재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그는 자신의 공연이 자살 사건을 조장했다는 모호한 혐의로 기소된다. 이 사건은 명백히 정치적이고 사회적으로 약자에 대한 탄압임에도, 법적 절차는 이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한다.

나리안은 표현의 자유를 통해 억압받는 계층의 목소리를 대변하려 했지만, 법정에서는 그의 사회적 지위와 정치적 신념이 오히려 범죄화된다. 이러한 설정은 법의 공정성이라는 이상과는 달리, 특정 계층과 권력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고, 소외 계층의 저항을 억누르는 데 활용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영화는 가난한 피고인이 법정에서 단순히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라 체제의 희생양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묘사한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법이 누구를 위해, 누구를 향해 작동하는지를 냉혹하게 묻는다.


인물의 계층적 대립: 법정 밖에서의 삶

영화는 단순히 법정 내의 논리 싸움에 머무르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사적 공간과 일상생활을 통해 계층적 차이를 더욱 깊이 드러낸다. 이를 통해 관객은 법정에서 마주치는 검사, 판사, 변호사 등의 인물이 가진 이중적 얼굴을 보게 된다. 검사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주부로, 자신의 직업을 단순히 생계를 위한 도구로 여기며, 피고인의 억울함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녀의 삶은 체제의 수호자로서의 책임감보다는 체제에 순응하는 개인으로서의 안일함을 보여준다. 판사는 노후된 법체계의 상징으로, 사건의 본질보다는 형식적 규칙에 더 집착한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피고인을 문제가 있는 계층으로 규정하며, 법적 공정성을 위배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편견을 드러낸다. 변호사는 피고인을 위해 헌신하지만, 그의 이상주의적 태도는 체제의 거대한 벽 앞에서 무력하게 느껴진다. 이는 개인의 의지가 거대한 사회적 구조와 맞서기 얼마나 어려운지를 반영한다.

특히, 이들 중 누구도 악인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영화는 그들이 그저 자신이 속한 계층과 체제에 따라 행동할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평온한 하루하루를 보여준다. 결국 구조적 문제를 인물의 윤리적 결핍이 아닌 사회의 본질적인 결함으로 돌림으로 강조하고 싶은 바를 조용히 설파한다.


연출: 침묵과 일상의 리얼리즘

타무하네 감독은 극적 연출을 철저히 배제하고, 침묵과 관찰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정적인 카메라와 최소한의 음악은 법정의 무미건조함과 피고인의 절망감을 극대화한다. 또한, 재판 장면에서 법적 공방이 오가는 동안에도 관객은 그 과정의 부조리함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법정 밖 일상의 느린 템포는 각 인물이 처한 사회적 배경과 사고의 기반을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변호사의 독신 생활, 검사의 평범한 가정 풍경, 판사의 평범한 일상 등은 그들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각 계층이 가진 관념적 한계를 암시한다. 평범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법의 제약없는 공간에서 이들은 웃고 즐기고 화내며 짜증낼 줄 아는 평범한 이웃처럼 보여주지만, 여지없이 그들의 입을 통해 얼마나 계층의 한계로 가득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연출 방식은 영화가 단순히 감정을 자극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고 곱씹어 볼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


법정은 누구를 위한 무대인가?

'법정'은 법적 정의와 공정함이라는 이상이 현실 속에서 얼마나 왜곡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법을 단순히 절대적이고 중립적인 시스템으로 묘사하지 않고, 사회적 계층과 이데올로기적 충돌의 한복판에 위치한 도구로 그린다.

영화의 결말은 어떤 극적인 해결도 제시하지 않는다. 피고인이 자유를 얻었는지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법정이라는 공간 자체가 얼마나 불공정한 구조 속에서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불평등이 우리의 일상과 사회 전반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한다.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우리 사회의 정의는 어떤 계층을 대변하는가?" '법정'은 그 답을 직접 제시하지 않지만, 관객이 법과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깊은 여운을 남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