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효목 변호사 Jun 04. 2022

끝에 이른 순간에 시작이 찾아왔다.

변호사님, 이제 너무 지쳐버렸습니다. 


아주 선한 인상의 남자분이 이혼상담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키도 크고, 젊고, 태도에는 예의가 가득했습니다. 가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선선한 날씨에 좋은 태도를 가진 상담 희망자. 이보다 더 좋게 이혼상담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은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내가 다른 남자를 만난다거나 과소비를 한다거나 그런 잘못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힘들어져만 가네요. 아내는 집 밖에 나가려고 하지 않아요. 하루 종일 집 안에만 있으려고만 합니다. 아직 어린아이도 있는데 아이는 하루 종일 아내가 집 안에만 데리고 있으려고만 합니다. 어린이집에 보내지도 않아요. 제가 회사에 가서 일을 하고 있을 동안에 아내가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가기라도 하면 참 좋을 텐데 아내는 집 안에만 있으려고 해요. 밤에는 휴대전화로 인터넷이나 게임을 하고, 새벽 즈음에 잠을 잡니다. 그리고 낮에 일어나 늦은 점심으로 첫 식사를 하고, 그것이 아이에게도 첫 식사가 됩니다. 그리고 계속 집 안에만 있다가 다시 새벽이 될 때까지 자지 않고 있어요. 생활이 완전 엉망이 되었습니다. 제가 달래도 보고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전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저도 미쳐버릴 것만 같습니다. 제일 걱정되는 것은 아이인데,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지 못할까 봐 걱정됩니다. 변호사님, 이제 너무 지쳐버렸습니다."




이혼에 대해서 물어본다.


이혼전문변호사로서 이혼 상담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사자의 이혼 의사'입니다. 민사소송이나 형사소송의 경우에는 변호사 상담을 신청할 때 이미 소송으로 해결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상태에서 오시는 경우가 많은데 이혼 소송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혼 소송은 아무래도 자신의 인생, 아이가 있다면 아이들의 인생, 또 부모님과의 문제 등 복잡한 사연들이 많아 이혼 결심을 하지 못한 채 이혼 상담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혼 상담할 때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지금 이혼상담을 신청하셨는데, 혹시 이혼에 대한 생각은 어떠세요? 다음 중에 어떤 마음일까요? 이혼을 꼭 하고 싶다, 이혼을 하고 싶지 않다, 아니면 이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지금 마음이 어떤가요?"



그분께도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이혼을 꼭 하고 싶습니다.' 그 남편이 얼마나 가정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이미 다 들었기에 더 노력할 생각이 있는지 물어볼 수는 없었습니다. 전심전력으로 오랜 시간 달려와 힘이 없어 눈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 더 뛸 수 있는지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그 남자의 이혼 소송을 하기로 했습니다. 아내는 이혼할 생각도 없었고, 그렇다고 현재의 자신의 생활을 바꿀 생각도, 의지도 없었습니다. 남편은 그래도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였으니, 이혼 소장을 작성하더라도 신경을 좀 써달라고 했습니다. 어떤 마음인지 잘 이해가 되었습니다. 이혼 소장은 일반적으로는 그동안 배우자의 잘못을 모두 고발하는 성격의 법률서면이므로, 배우자의 유책행위를 밝히는데 집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경우에는 남편의 마음과 아내의 마음을 모두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신중히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의 온도를 조절했습니다. 최대한 감정적이지 않고 조심스럽게 한 문장 한 문장을 적어 내려갔습니다. 이혼 소장보다는 이별을 앞둔 남자의 편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한 때 사랑했던 아내와의 이혼을 구하는 이혼 소장을 작성해 가정법원에 제출했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아내는 남편의 이혼 소장을 받아보았습니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면 너무 식상한 표현일까

 

 아내는 남편의 이혼 소장을 받아보고서도 어떠한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배우자로부터 이혼 소장을 받으면 변호사를 선임해서 이혼 소송을 진행하기도 하는데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아내가 어떠한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했습니다. 역시 남편이 말한 대로 아내는 일종의 무기력증에 빠진 것만 같았습니다. 그냥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에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남편의 이혼 결심은 훌륭한 선택 같았습니다. 부부는 함께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잠시 힘이 들어 멈춰 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기 싫다고 버티는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여정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혼소송 첫 변론기일이 다가올 때였습니다. 하필 크리스마스이브였습니다. 저는 주말이나 연휴가 다가오기 전에는 다시 한번 진행하고 있는 사건들을 하나씩 확인을 해보는데 그날따라 이 남자의 사건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렇게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변호사님, 안녕하세요. 다른 변동사항은 여전히 없어요. 그냥 이렇게 이혼하는가 봐요. 재판 때는 변호사님께서 가주시니 저는 회사 가서 일을 하고 있겠습니다. 재판 마치고 연락 주세요. 크리스마스 연휴 잘 보내세요."



그의 말은 누가 봐도 이혼을 결심한 남자의 의지를 느낄 수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달라진 것을 느꼈습니다. 말은 이혼을 원하지만 마음은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마지막 안부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그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혹시, 여전히 이혼하고 싶으실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한 번 생각을 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혼 소장을 제출하고서도 이혼 소송을 취하하고 함께 다시 행복하게 살아가는 부부도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마음이 흔들리신다면, 여전히 아내를 사랑하신다면, 아내와 함께 다시 조금 더 노력해보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꼭 이혼이 정답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이기도하니까요."



전화기 너머의 그는 살짝 얼굴의 긴장이 풀려 미소를 짓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알겠습니다. 변호사님.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답이 돌아왔습니다. 



며칠 지나 남자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전화를 건 그 크리스마스이브에 남편과 아내는 진지하게 다시 이야기를 해보았다고 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있는 그래도 솔직하게 보여주었고 사랑하는 아이를 위해서 다시 한번 노력해보기로 했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변호사님, 이혼 소송 취하해주세요. 이혼하지 않고 다시 잘 살아보겠습니다."



마치 제가 그분들의 두 번째 결혼식의 주례를 한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라는 너무나 유명한 말이 있지만 이 사건에 그 말을 인용하기는 부족해 보입니다. '끝에 이른 순간에 시작이 찾아왔다.'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것 같습니다. 



이혼 소장의 제출은 혼인관계의 파탄을 의미합니다. 혼인관계가 끝이 났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때로는 그 혼인관계의 파탄이라는 현실을 직면한 순간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합니다. 새로운 방향을 찾기도 합니다. 어떤 답을 내리든 오답은 아닙니다. 모든 결정이 다 정답입니다. 나의 인생이고,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선택에 틀린 답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지금도 그 남편과 아내, 그리고 아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다시 이혼을 결심하게 되면 저에게 연락을 하겠다고 한 그 남자의 연락이 없는 것이 마치 지금도 행복한 가정생활을 하고 있다는 계속적인 연락 같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이혼전문변호사로서 성공적인 이혼을 보는 것도 행복이지만, 성공적인 재결합을 보는 것도 큰 행복입니다. 




이전 글 :   (15)  누구도 그녀를 때릴 수는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