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이 된 이후부터 술은 내 생활에서 뗄레야 뗄 수 없었지만 난 취업하기 전까지 술을 싫어했다. 싫어했던 이유는 단순히 맛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없어서 못 먹지만.
첫 술의 경험을 떠올리자면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나고였다. 수능이 끝난 후 어느날, 친구를 우리 집으로 불렀다. 그리고 집 냉장고 안의 내내 봐뒀던 캔 맥주 한 캔을 친구와 나눠마셨다. 사실 나눠마셨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각자 한 입씩 먹고 그 길로 남은 맥주는 모두 싱크대에 양보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아깝기 그지없다.- 내가 먹고 싶었던 건 흔히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청량하기 그지 없는 시원한 캔 맥주 한 캔이었다. 그러나 어린 내 입으로 들어온 건 탄산 섞인 알코올램프였다. 아메리카노도 못 먹는 ‘애기 입맛’이었던 내게 청량한 맥주 한 캔의 로망은 그 길로 사라져버리고 말았고 그 이후로 ‘술 싫어’ 인간이 되어 몇년을 살았더랬다.
그 이후 필수적인 음주만 하며 지내다 본격적으로 취업을 한 뒤 술맛을 알았다. 친한 직장동료들과 퇴근하고 마시는 술자리에 중독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 그다지 힘든 업무도 아니었는데 괜히 업무가 힘들었단 핑계를 대며 술자리를 가지기 일쑤였다. 통장 잔고의 그만하라는 외침을 끝끝내 무시하면서.
술을 즐기게 되니 어느샌가부터 페어링에 매우 관심이 생겼다. 이젠 마냥 저렴한 술집에서 떠들고 노는 술자리보다 맛있는 안주와 어울리는 술을 마시는 것이 훨씬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코미디언은 술과 안주의 페어링을 매우 중시한다고 했다. 그에게 있어 ‘페어링’은 술과 어울리는 맛있는 안주에서 이 술을 마시며 듣고싶은 음악, 보고싶은 영화, 이 술이 마시고 싶은 계절, 같이 술잔을 기울이고 싶은 사람, 술을 마시며 나누는 대화까지 의미가 확대된다. 그는 기꺼이 곰탕에 소주를 맛있게 먹기 위해 늦가을에 영화 <만추>를, 정원영의 노래 <겨울>을 소주와 페어링한다. 나는 그의 생각과 취향에 깊이 공감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주변사람과의 술자리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순히 ‘술을 마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특히 나는 겨울밤에 이뤄지는 술자리를 좋아한다. 차가운 바깥공기에 두터운 외투를 입고 술집을 들어서면 금세 느껴지는 훈기와 맛있는 음식냄새가 좋다. 차가운 겨울공기가 배어있던 옷이 금방 따뜻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사람들과 많은 얘기를 나눈다. 그럴 때 안주는 따뜻한 나베 아니면 회가 가장 좋다. 배가 어느정도 차고 알딸딸해지면 가벼운 안주로 2차를 한다. 2차를 할 땐 좋은 노래가 나오는 바가 딱 좋다.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칵테일을 마시면 더 많은 얘기가 나온다. 그럴 땐 올해가 벌써 다 갔네- 라는 누군가의 대사가 꼭 곁들여지고 그 대사를 시작으로 각자 올해는 뭐가 기억에 남고, 무엇을 이루었으며, 내년에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대화를 한다. 지나가는 시간에 대한 ‘연말정산’을 술과 함께 페어링하는 것이다. 매년 해도 질리지않는 대화거리다. 누군가는매일 똑같은 출퇴근의 반복이라서 크게 생각나는 일이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올해 가장 좋았던 책과 영화를 꼽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에 대해 얘기를 하다보면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항상 그런 만족스러운 술자리를 가지는것은 아니다. 어느날은 친구가 인스타에서 찾은 핫플레이스를 야심차게 방문했다. 숙성 사시미를 파는 곳이었는데 사람이 많아 웨이팅도 하고 꽤 비싼 가격의 음식들도 시켰다. 그러나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일까, 생각보다 양이 적고 맛이 평범했다. 다들 음식을 먹고 흐음- 하는 반응을 하고 있으니 그 가게를 가자고 열심히 주장한 친구가 미안함과 머쓱함을 느끼는 듯 했다. 그러나 기본 안주로 트러플 오일을 뿌린 감자칩이 나왔는데, 그것이 생각보다 맛있어 외려 메인 음식보다 좋은 안주가 됐다. 그리고 감자칩에 트러플 오일이라니. 새로운 조합을 알게 되어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그러나 양이 적었던 안주는 금방 동났고 소주는 반병이상 남았었다. 감자칩을 너무 많이 리필해 먹은 터라 더이상 리필하기도 좀 뻘쭘했다. 그러던 중 친구가 코트 주머니에서 츄파춥스 젤리를 꺼내는 것이었다. 젤리 겉에 신 가루들이 많이 묻어있는 지렁이 모양 젤리였는데 생각보다 그 달고 신 맛이 의외로 소주와 잘어울렸다. 우리는 덕분에 남은 술을 ‘아깝지 않게’ 비우고 가게를 나올 수 있었다. 비록 실망스러웠던 핫플레이스 투어였지만 우리는 그 안에서 소주와 어울리는 작은 발견을 두가지나 했다. 트러플 오일을 뿌린 감자칩과 젤리. 그런 작은 발견들도 술자리의 재미며, 새로운 페어링의 발견이 아닐까 ? 앞으로도 더 많은 나만의 페어링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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