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기억에 관한 단상
물건은 참 신기하다.
물건은 어떤 기억과 선택적으로 연결되어 회상 촉진제 역할을 한다.
저녁에 슈퍼에 와인을 사러 갔다. 시간은 많고 뭘 사야 할지는 모르겠기에 레드와인을 산지별로 훑어보고 화이트 와인까지 넘어왔다.
쇼비뇽 블랑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와인병 포장지에 적힌 sauvignon blanc을 뚫어져라 보면서 문뜩 석사 때 라이든으로 교환학생 갔던 게 생각났다.
짧은 가을 학기를 끝내고 한국 들어오기 전에 물질문화 실험실에서 토기 사용흔 실험을 며칠 한 적이 있다.
토기를 사용할 때 그 방식에 따라 어떤 흔적이 남는지 실험하고 관찰해 데이터를 만드는 일이었다.
붉은 토기와 유약 발린 검은색 토기 그릇에 꿀과 와인을 넣고 나무줄기로 만든 거품기로 1시간, 2시간, 3시간 휘저어 토기 안에 남은 흔적을 현미경으로 관찰해 새로운 토기와 비교하는 과정을 거친다.
섞는 일는 아주 단순해서 참을성과 지구력을 아주 많이 요한다.
라디오를 듣다가
음악도 듣고
섞는 동작을 반복할 때 와인 병만 계속 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 한 번은 옆 실험실에서 일하시는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와인병을 보고는
'쇼비뇽 블랑 2017년. 음 조금 남았으니까 마시면서 하면 되겠다'하시곤 떠나버렸다.
나는 그제서야 와인병에 적힌 글자들을 읽기 시작했고
내가 섞고 있는 와인은 프랑스산 쇼비뇽 블랑이란 걸 알게 되었다.
꿀이 적당히 들어가서인지는 모르겠는데 거품기로 와인을 섞는 내내 달콤한 향기가 났다.
마직막까지 한 모금 마실 용기를 내지 못해 결국 조금 남은 그대로 와인병을 실험실에 놔두고 라이든을 떠났다.
그 이후로 쇼비뇽 블랑을 볼 때면 네덜란드에서 혼자 실험실에 남아 와인을 섞고 현미경으로 토기에 남은 스크래치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사진 찍은 기억이 난다.
현미경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아주 작은 물건에 내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어서일까. 내가 보고자 하는 공간의 범위를 철저하게 통제할 수 있어서 그런 걸까.
그 물건이 물리적인 실체가 있을 필요는 없다.
한동안 밤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찬 바람맞으면서 자전거 타고 집으로 돌아갈 때가 있었다.
집에 갈 때면 꼭 같은 노래를 반복 재생했다.
너무 늦어서인지 집으로 가는 길엔 종종 아무도 없었고 노란 가로등과 자전거가 지나갈 때 살짝 쿵쿵거리는 다리 소리뿐이다.
너무 조용해서 그 조용함 자체가 소리인 것 같았다.
그러다가 하늘을 보면 별이 있거나 진한 푸른색 하늘이 덮여있었다.
가사 중에 '별들이 머리 위에 떠있을 때까지'라는 대목이 있었고
이 부분이 돌아올 때면 온 세상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 마냥 든든했다.
이사를 한 후로 그 길을 지나지 않게 되어 그 노래도 더 이상 찾지 않게 되었다.
한참 뒤에 어쩌다 그 노래를 다시 듣게 되었다.
처음 다시 들었을 때 그 기억이 너무 생생해서 형광등 아래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어도 밟은 만큼 나가는 정직한 자전거 위에서 바람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노래를 많이 들을수록 기억이 희석될 것 같아 더 이상 찾아서 듣지 않게 되었다.
그 물건에 대한 기억은 굳이 내가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
엄마는 가끔 맥주 반주를 즐기셨다.
맥주와 어울리는 안주로 초콜릿을 꼽으셨다.
그냥 초콜릿이 아닌 얼린 초콜릿.
엄마가 대학생 때 한 번은 안줏거리가 없어서 우연찮게 냉장고에 남은 초콜릿을 친구랑 나눴다고 했다.
'보통은 맥주 안주로 쪼꼴렛을 잘 안 먹잖아. ... 근데 그게 얼마나 맛있었는지. ... '
엄마는 이 이야기를 잊어버릴 때쯤이면 몇 번이고 다시 해줬다.
그래서 나도 한 번은 맥주와 얼린 초콜릿을 먹어봤다.
솔직히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 차가운 맥주에 초콜릿이 녹기는커녕 초를 씹는 것 같았다.
아마 엄마는 맥주와 초콜릿으로 한때의 낭만을 자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경험하지 못한 엄마의 청춘을 초콜릿에 담아서 말이다.
그리고 나는 초콜릿에다 엄마와의 이야기를 저장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