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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영 Nov 13. 2022

가지와 맥주와 스리라차

물건과 기억에 대한 단상

코로나가 한창 심할 때 런던에서 석사를 하고 있었다. 

거의 온라인 수업이라 어디 갈 때도 없이 집과 도서관만 왕복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아침의 공원 조깅은 유일하게 마스크를 벗어 맘껏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조심한 게 어색하기도 하지만. 



처음 6개월 동안은 마러본이라는 동네에서 지냈다. 그 동네에서는 비싼 슈퍼와 납작한 차가 많이 보이고 하이드파크와 리젠트파크가 10분 거리에 있다. 

리젠트파크는 힘써서 정돈된 예쁜 정원 느낌이라면 

하이드파크는 한눈에 저 멀리까지 볼 수 있는 탁 트인 큰 공원이다. 


기분 따라 하이드파크를 가거나 리젠트 파크에 갔다. 

두 공원에 가는 길도 조금 달랐다. 

하이드파크 가는 길은 카페와 식당, 쇼핑가의 뒷골목을 지나고

리젠트파크는 조지안식 건물의 주택가, 그 주택 주민만이 쓸 수 있는 개인 공원, 그리고 셜록홈스의 집을 거쳐 공원에 도착한다. 


처음엔 2분 더 가까운 리젠트 파크에 더 자주 가다가 

트인 공간이 더 많은 하이드 파크를 주로 가게 되었다. 

리젠트 파크는 너무 예쁘고 화려해서일까 

엄동 한설 속에도 피어있는 장미와 아주 이른 새벽에만 보이는 정원사를 조깅하며 마주하기엔 부담스러웠다. 




아침의 공원은 적지 않게 부끄럽다. 

밝아진 하늘 아래 어젯밤의 흔적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다.

맥주캔과 휴지, 쌓인 담배꽁초, 플라스틱 포장지


그 민낯을 보는 재미에 아침 조깅을 계속하게 되었다. 

토요일, 일요일 아침의 공원은 더 날 것의 상태다. 

쓰러진 나무 틈 사이로 휴지 조각이 끼워져 있고 일회용 컵이 풀 위에 살포시 떠있다. 

어떤 하루는 벤치에 가지와 스리라차 소스가 놓여 있었다. 


2021년 5월 하이드파크 


아직 신선해 보이는 저 가지는 어쩌다 이곳에 뉘어 밤을 보내게 된 것인가.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공간 앞으로 가지만큼이나 신선한 담배꽁초가 꽤나 많이 뿌려져 있다. 

어떤 대화를 나누며 스리라차 소스를 먹었을까 



겨울에 해가 짧아져 한동안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조깅을 하러 갔다. 

충분히 일찍 가면 넓디넓은 하이드파크에 혼자 질주한다. 


맑은 공기에 축축하고 말캉한 잔디

몇 번만 밟아도 운동화의 앞코가 진한 색으로 변한다. 

차오르는 숨을 고를 때면

해가 비로소 뭉실거리며 떠올라 사방에서 나를 감싸 안아준다. 


멀리 있는 나무가 브로콜리보다 작아 보이는 공원에 제자리 서서 한 바퀴 돌아봐도 아무도 없을 때면 

내가 세상을 가진 기분이 든다.  


한껏 펼쳐진 공원의 바닥과 저 끝에서 시작되는 오솔길까지 모두 내게 내어준다. 

오늘은 무엇이든지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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