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과 기억에 대한 단상
나에게는 낡은 필통이 있다.
까만색과 흰색 줄무늬 천으로 만들어졌고 새끼손톱 길이만 한 아몬드 모양 지퍼가 있다.
지퍼가 너무 가늘어서 필통을 여닫을 때마다 엄지와 검지에 힘을 바짝 줘야 한다.
필통은 2011년 1월 즈음에 같은 학원을 다녔던 미대 언니한테 받은 선물이다.
입시 준비하러 혼자 북경으로 갔을 때
언니가 갑자기 연락이 와서 소포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나는 필통 두 개를 만들어 달라고 했고 내가 원하는 크기로 주문했다.
얼마 후 네모난 소포를 받아 나는 학원 책상에서 상자를 뜯었다.
하나는 지퍼가 달린 줄무늬 천 필통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서류봉투처럼 끈으로 돌돌 말아 여미는 필통이었다.
줄무늬천 필통은 올해로 열두 해를 썼다.
지퍼를 열고 닫을 때마다 필통 한쪽을 잡아 양 끝에 천이 유달리 많이 닳았다.
천이 여러 겹으로 만들어졌는지 바깥쪽 천이 마모되면서 안감이 드러났다.
잇몸이 내려앉는 게 이런 걸까.
시간이 지나면서 안감은 더 많이 드러나고 바깥쪽 천은 몇 가닥 실로 겨우 붙어있다.
그동안 쓴 만년필 잉크가 색깔별로 여기저기 번져있고
필통의 안쪽에는 볼펜 자국이 수두룩하게 박혀있다.
오래된 잉크는 씻어도 옅어지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
세탁기에 던져서 빨았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커피를 쏟아 그제야 한숨 쉬면서 마지못해 씻어준다.
세면대에서 몇 번 조물조물하고 널어둔다. 비누칠을 조금만 더 세게 해도 녹을 것 같다.
필통을 빨 때마다 뒤집어야 나타나는 어수선한 갈색 실이 보인다.
저 가느다란 실에 지퍼가 붙어있는 게 신기하다.
가끔은 내 필통을 보면서 이게 없어지면 느낄 상실감을 예습한다.
볼펜 몇 자루 넣을 주머니야 무엇이든 안 되겠건만.
열두 해 동안 너를 보면서 때린 멍과
지워지지 않은 얼룩들을 떠나보낼 상상만 해도 그 순간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내가 필통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일부가 필통에 스며든 게 확실하다.
줄무늬 천과 가느다란 아몬드 지퍼에 손이 닿는 촉감으로 나를 길들인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