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에 꽤나 많은 전시를 봤다.
특히 5월부터 8월까지는 한국에서 필드워크를 한 기간이라 박물관에 가는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았다. 전쟁기념관과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합쳐서 적어도 서른 번은 다녀왔을 것이다. 슈퍼보다 박물관에 더 자주 갔을 것이라 확신한다.
올해도 ICOM 카드 덕분에 British Musuem, Tate Modern 등에서 하는 값비싼 특별전도 여력이 되는 만큼 볼 수 있었다. 미국에 잠깐 다녀오기도 했는데 이곳에서도 ICOM카드를 잘 썼다.
친구들이랑 우연히 들어간 박물관도 심심치 않게 섞여있다. 친구들이랑 전시를 보게 되면 전시를 평가하는 것보다 소비하게 되어 오히려 기분 좋은 관람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역시 혼자 본 전시가 압도적으로 많다.
아직 뭣도 모르지만 그래도 양이 어느 정도 쌓이니 나름의 고집이 어렴풋이 생기는 것 같기도 하다. 잘 만든 전시와 나쁜 전시에 대한 생각도 하기 시작했다.
올해는 나쁜 전시를 적잖게 봤다. 무엇이 그렇게 나빴는지 한번 정리해 봤다.
첫 번째로는 나쁜 내용을 당연하게 말하는 전시다.
나쁜 가치관을 공고히 하거나 오직 자신만이 맞다고 주장하는 박물관들이다. 이런 부류는 가장 못 되고 바로잡기 힘든 나쁨이 아닐까 싶다.
하반기 영국박물관 (British Museum)에서 본 두 개의 전시 모두 썩 기분 좋은 전시가 아니다.
"China's Hidden Century"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의 '다양성'을 보여주고자 한 전시다. 만다린, 만어滿語, 몽골어, 광둥어 등을 오디로 녹음해 들려주고, 중국 유학생들과 협업해 청나라 착장을 재연한 모습을 보여줘 다양성에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이 전시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20세기 영국의 제국주의 유산을 인정하지 않은데 있다. 거의 대부분의 전시품은 영국박물관, 영국도서관, 그리고 영국 왕실 소장품으로 구성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물건들의 출처와 타당성에 질문을 유도하는 시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무단침입해서 부수고 뺏어 온 물건이 원래 박물관에 있었던 것처럼. 여러 문화가 섞인 청나라에서 추구한 건 다양성 보다 화합 또는 하모니가 아닌가. 맞지 않은 옷인데도 트렌드가 그러니 우겨 입힌 감이 없지 않다.
위 사진에서 보이는 청색 건물 장식은 이화원에서 영국군이 약탈해 왔던 보물이다. 내가 전시를 보러 갔던 날 90프로 이상의 관람객이 중국인으로 보였고, 이들 중 상당 수가 원명원圓明園과 이화원頤和園에서의 약탈을 역사교과서에서 배웠을 것이다. 전시에서 이화원은 영어로 summer palace로 번역했다. 내 뒤에서 이를 보던 어떤 남자가 일행에게 물었다.
“这个summer palace是哪里啊”
(여기 이 summer palace가 어디야)
"这好像是一个夏宫"
(여름 별장 궁전 같은데?)
탈식민지화 구령을 수년간 외치고 있는 대영박물관은 summer palace 옆에 한자로 頤和園를 결코 표기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이 둘은 초등학교부터 수없이 외웠던 역사를 두 눈으로 보고도 이렇게 지날 수밖에 없었다. 치사하고 어이가 없었다.
12월 말에 본 Burma to Myanmar 도 비슷한 맥락에서 보는 사람 뒷목 잡게 하는 전시다. 전시는 식민유산을 찬양하고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에서 벗어 나오려 하지 않았다.
영국의 박물관은 식민유산과 질척이는 반면 한국은 또 그 나름의 문제를 갖고 있다.
봄부터 여름까지 한국에 있으면서 한국전쟁 관련 전시를 가능한 많이 보려고 했다. 자연스레 근현대사를 다루는 기념관과 박물관을 많이 다니게 되었다. 이 중 상당수는 박물관이라기보다는 과거해석의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 보였다. 전시내용이나 실제 관람객의 숫자보다 단지 그곳에 기념관이 존재한다는 자체가 의미의 전부다. 박물관이 무슨 소용인들 쓸모없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명품가방과도 같은 존재다. 담을 것으로의 용도는 큰 의미가 없다. 가방의 가치와 소유만이 있을 뿐.
근현대사를 전시하는 박물관과 기념관도 마찬가지다. 특정 인물과 사건을 기념하는 공간의 물리적 존재가 과거사 해석의 권력의 시각적 상징이다. 이들을 통해 국가정체성 형성에 큰 축이 되는 근현대의 마디들을 쥐어잡는다. 구조적 문제의 표출이나 국가폭력을 권력유지를 위한 합의된 해석에 귀결하고 또 그것만이 올바를 역사라고 주장한다. 많은 박물관은 지금도 꾸준히 근대사 해석 패권의 고착화에 이용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박물관이 '왜곡된' 역사를 전시한다며 예민한 척 야단법석일까.
박물관도 사람 손을 타야 한다.
좋은 전시도 꽤나 많이 봤다. 질문을 하고 생각을 하게 만들거나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한 전시들이다.
한국전쟁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하나만 추천해야 한다면 43 평화기념관은 꼽고 싶다. 생각할 공간을 내어주고 나에게 질문할 수 있도록 도와줬던 전시다. 참 고마운 전시다.
어둡고 어려운 과거를 전시하는 동시에 관람객에게 긍정적인 영향에 동참할 기회를 주며 힘과 희망을 심어준다. 사립박물관 중에서 보기 드문 전시의 퀄리티를 선보였다. 주제와 메시지가 명확한 전시다. 경기도에 살더라도 하루쯤은 이 박물관을 위해 서울을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한국전쟁 중 그리고 전쟁 이후 전쟁으로 인해 바뀐 일반시민의 삶을 보여주는 전시. 마을 주민의 개인사를 인류학, 민속학 접근을 통해 전시를 꾸렸다. 잘 만든 마을 박물관이지만 유지가 되지 않은 것 같아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소소한 기쁨을 준 전시도 몇몇 있었다.
뽀송뽀송한 이불에 들어가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기분이랄까. 유쾌한 전시들이다.
멸치 냄새가 나는 전시. 너무 재밌어서 한번 더 가고 싶었지만 결국 다시 못 본 전시.
올해의 광주 비엔날레는 전체적으로 퍽이나 실망했는데 이 작품 덕분에 KTX가 아깝지 않았다.
힘든고 어둡고 어디서 풀어야 할지 모를 과거사 해석에 감히 유머를 더한 충격 그 잡채의 작품.
국박의 특별전은 특유의 감성을 자극한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과거와 감정적인 교감을 유도한다고나 할까.
그리고 7월에 시카고에서 이분의 작품을 다시 봤다! 길 가다가 멀리서 뭔가 보이길래 가까이 갔더니 Agora라는 작품이 시카고에 있다는 걸 그제야 생각났다.
Tate 가 전체적으로 예전을 못 따라가고 있다고 느끼는 건 나뿐인가. Capturing the Moment는 사진의 역사에 관한 전시다. 전체적으로 너무 무난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 전시다. 이 작품만 인상 깊게 보았다.
아쉬움이 많았던 전시도 꽤 많다.
National Portrait Gallery 가 올해 6월 재개관한 이후로 처음 가 보았다.
12월 말에 부랴부랴 특별전을 두 개 보았지만 적지 않게 실망했다. 사진전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상업적이었고 호크니는 특별한 감흥을 주지 않아서 실망스러웠다.
중간중간에 본 이런저런 전시들. 런던 가서 보거나 학회 가는 김에 둘러본 전시가 대부분인 것 같다.
런던으로 전시를 보러 갈 때는 기차표가 아까워서 한 번에 두세 개는 보고 온다. Tate, V&A, British Museum, IWM 등 눈여겨보는 박물관에서 새로운 전시를 하면 보러 가는 김에 전시를 하나 둘 더 보고 온다. 나중에 본 전시는 게으름 피우는 경우도 많다. 이럴 때는 나한테 커피 한잔 대접하면서 관람을 마무리한다. 전시를 적당히 보면 돌아오는 기차에서 생각이 정리된다.
모든 전시를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 오히려 충분히 즐기지 못할 때도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치이거나, 지루한데 기필코 다 봐야겠다는 욕심 때문에 지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기차에서 아무런 생각을 떠오르지 않는다. 적당히 봐야지 하면서도 매번 아쉬워서 적당히를 못 지킨다.
"아 맞다 여기도 갔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