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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영 May 16. 2022

트라울

땅파기 좋은 날 2

나는 이탈리아제 바티페로 여성용 트라울을 쓴다. 

여성용 트라울은 손잡이가 일반 트라울 보다 얇다. 그래서 손이 작은 사람들한테 적합하다. 

이 트라울은 대학원을 합격하고 내가 나에게 준 선물이다. 


현장에서 트라울은 손의 연장선이다.  

우리말로 트라울은 흙손이라고도 한다. 

흙손은 맨손으로 하기 어려운 일들에 힘을 써준다. 


뾰족한 모서리로 단단한 퇴적토를 깨고 

날카로운 날로 덮인 흙을 긁기도 하고 

유구의 윤곽선을 그어준다. 

망치가 손 닿는데 없으면 트라울 거꾸로 잡아 손잡이로 못을 박기도 한다. 

주거지의 벽면도 확인하고 수혈의 바닥도 드러낸다. 

스케일이나 방향판이 없을 때 요긴하게 쓰이기도 한다. 


트라울은 쓰다 보면 얇아지고 작아진다.  

사람들의 사용 방식에 따라서 모양도 달라진다. 

한 번 한 번 긁을 때마다 철로 만든 트라울의 면도 조금씩 닳는다. 

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다 보면 돌이 파이는 것처럼. 

한 번 한 번 사용할 때마다 내 손도 트라울에 길들여진다. 

그래서 트라울은 현장에서의 세월을 증명하기도 한다. 


이렇게 현장에서 여러 일을 해주는 트라울은 나한테는 숟가락과 같은 존재다. 

줄자나 연필 같은 다른 도구에 비해서 훨씬 많이 사용하고, 늘 지니고 다니기 때문에 사적이다. 

그래서 숟가락을 함께 쓰는 사이가 아니면 트라울을 빌려 쓰고 싶지 않다. 

그대들은 숟가락을 나눠 쓰시나요. 

남의 트라울을 막 던지지 않고 밟지 않는다. 

그대들은 남의 손을 아무렇지 않게 밟고 지나가시나요. 


나의 첫 트라울은 경량 마샬타운으로 선배가 물려주었다. 

그리고 중국 여기저기 현장을 다니면서 연구소 자체 제작 트라울을 써봤다. 

이 트라울들은 각 지역의 토양 특성에 맞춰 만들어져 모양이나 무게가 조금씩 다르다. 


그러면서 나와 맞는 트라울을 한참 찾아 헤맸다. 

나에게 맞는 옷과 신발을 찾는 것처럼. 

손잡이의 두께와 촉감 

트라울 날의 두께 

손잡이에서 트라울 면까지의 거리 

그리고 손목까지 가는 무거움의 정도 

모양새가 비슷하고 같은 기능을 하지만 나에게 조금 더 잘 맞고 편한 트라울을 찾아서. 


발굴 현장에서는 중장비가 돌아가고 작업복에는 늘 흙이 묻어있다. 

언뜻 보기에는 모든 일이 둔탁하고 큰 동작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나에게 더 세심한 신경을 써야 하기도 한다. 

나에게 맞는 도구를 찾는 것부터 나의 한계를 알아가는 일. 


지치기 전에 알아차려 한 템포 쉬어가고 

오해가 너무 많이 쌓이기 전에 풀어주는 노력. 

무엇보다 이 노력을 애써하지 않는 요령을 찾아간다. 

청주 현장 주거지 세부. 발굴 가방, 트라울, 가리, 기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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