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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영 May 17. 2022

가장 재밌었던 발굴

땅파기 좋은 날 3

고고학을 전공한다고 자기소개를 하면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우와! 저도 어렸을 때 고고학자가 꿈이었어요." 

아주 고전적인 반응부터 시작해  

"그럼 실제로 발굴도 가나요?"

발굴은 고고학에서 자료를 확보하는 보편적인 방법이라서 밥 하기 전에 장을 보는 것과 같다. 


사실 발굴하기 전에 어떤 종류의 유구가 나올지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발굴에 들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따른 준비를 할 수 있다. 특히 한국 같은 경우는 개발에 따라 아주 많은 발굴이 이루어졌기에 첫 삽을 뜨기 전에 발굴 구역이 청동기시대 주거지 유적인지 조선시대 회곽묘 분포지 정도는 알고 들어간다. 심지어 개별 주거지를 발굴하기 전에 땅에 노출된 형태만으로도 집터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 솔직히 어떤 거대한 미지를 앉고 발굴에 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장 신나게 발굴했던 유물을 꼽으라면 첫 현장 내 피트에서 나온 돼지 머리뼈라고 말하고 다닌다.


첫 유적은 누구에게나 특별한 경험이다.  

들뜬 마음으로 트라울을 개시하고 

학교에서 배운 이론이 얼마나 정제된 묘사인지 깨닫고 

지루한 발굴의 일상에 땅과 권태기를 가진다. 

그리고 운 좋게 매력을 찾아서 고고학을 계속할지 그만둘지 결정하기도 한다.


나의 첫 현장은 학과 실습으로 간 중국 섬서성의 신석기부터 상주 시기의 유적이었다. 

발굴 실습에서는 각자 5미터 너비의 사각형 피트를 끝까지 파내려 가고 거기서 나온 유구와 유물을 정리한다. 나의 그리드에서는 처음에 동물뼈만 주구장창 나오더니 두 달이 지나도록 수혈만 나왔다. 그날 나온 동물뼈를 자루에 담아 숙소까지 이고 가는 것도 한동안 나의 일과였다. 

다른 친구들은 집터며 부장품 있는 무덤이며 신기한 토기가 묻어있는 저장공을 발굴하고 있는 걸 보니 너무 배가 아팠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귀찮은 마음으로 트라울질을 하던 도중 뼈가 나왔다.

바로 선생님께 달려가 무덤일지도 모른다며 어서 와달라고 여쭸다. 

선생님은 와서 한번 긁어보시더니 나의 심심한 사정을 아시는지 인골 발굴할 때 쓰는 키트를 가져와 뼈를 노출시켜보라고 하셨다. 나의 피트에도 드디어 재밌는 거리가 나와서 잔뜩 신나서 흙을 긁어내기 시작했고 이내 돼지 대가리가 온전하게 나왔다. 동물뼈를 전공하는 선배님을 내 피트로 초대해서 보여주기도 했다. 


돼지 머리뼈만 나와서 정황이라고 할 것도 없이 최종 보고서에는 한 줄 기록만 남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쓰레기처럼 묻힌 돼지뼈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그 돼지뼈는 무료한 삽질의 연속에 나타난 한 줄의 빛과 같은 존재여서 나에겐 가장 신났던 발견이다. 

나의 첫 피트 그리고 작업이 끝난 피트 (2013년 11월)


도면 그리는 중 (2013년 10월 사진: 李秋雨)

발굴은 늘 재밌고 신선하지만은 않다. 


현장에서는 늘 발굴과 기록의 연속이다. 발굴하는데 반나절이 걸린다면 기록 사진과 도면에는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반복이 어느 정도 쌓이면 땅이 보이기 시작한다. 

흙의 색갈이 달라 보이고 이 땅에 일어난 일에 대한 나의 주장이 생기면서 재밌어진다. 이런 재미는 특별한 유물이 나오는 것보다 더 중독되기 쉽다.


가장 재밌었던 발굴을 꼽으라면 아제르바아잔에서의 담벼락일 것이다.  

보통의 현장에서는 공사기간에 맞춰 발굴을 끝내야 하기 때문에 여유를 부리거나 흙덩어리의 선후 관계를 찬찬히 따지는 정석의 발굴할 수 없다. 이에 반해 아제르 발굴은 시간에 덜 쫓기는 학술발굴이었다. 유적도 적당이 어려워서 천천히 한 손 한 손 흙을 긁어보고 그 질감의 다름과 말라가는 색을 음미하며 작업할 수 있었다. 


유구는 보통 흙의 결의 다름으로 확인한다. 

땅에서 일어난 일이 시간차를 두거나 목적이 다르면 흙도 상이하게 쌓인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퇴적 후의 땅에서 일어난 활동이나 지역 토양의 특성으로 그 차이가 안 보일 때가 종종 있다. 


하루는 보일락 말락 했던 흙을 두고 어려워하고 있었다. 

너무 더워서 등이 타들어 갈 것 같았지만 오기가 생겨서 오후 내내 뾰족한 수 없이 그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겨우 긴가민가 하면서 긁어놨더니 그게 오븐이 있던 자리였다. 아제르 현장에서 처음 그은 선이라서 유난히 들뜨기도 했다. 


오븐을 확인한 다음 돌덩이가 쌓인 구역으로 넘어갔다. 돌이 무너진 자리라 돌덩이가 여기저기 흩어져 무엇의 정체를 확인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같이 발굴했던 선생님과 친구들도 몇 번 왔지만 한 참 동안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가 해가 넘어가고 빛이 바뀌면서 서서히 다르게 보였다. 돌만 잔뜩 널브러뜨려진 땅에서 두 개의 담벼락이 만나는 지점을 확인했던 순간은 참 찌릿했다. 사다리에 올라 사진도 찍고 도면에 돌도 하나하나 정성스레 그려줬다. 아마 시간을 많이 쏟아서 그 담벼락과 정이 쌓인 것일지도 모른다. 


현장에서 발굴하는 사람들은 다 안다. 

일 센티의 흙이 몇십 년 몇 백 년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나의 한 삽, 트라울질 한 번이 수천 년의 시간을 긁어낸다는 것을. 

그만큼 신성하지만 반복적 작업은 낭만을 쫓아내고 조급함만 남긴다. 

그래서 이렇게 흙을 두고 한참 고민하고 상의할 누군가가 있는 현장에서의 경험은 흔치 않은 축복이다. 

좌: 아제르바이잔에서 우물파는 중.  우: 우물에서 보이는 사람들 (2018년 7월)

마지막으로 나의 첫 인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 

중국에서의 두 번째 발굴은 산동의 제나라 수도가 있던 유적에서 있었다.

발굴 초기 때 투입되어 제나라보다는 그 위에 쌓인 한나라 시기의 것을 발굴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무덤을 발굴하기 전에 묘광이나 관이 삭은 자리가 보여서 그 선을 따라 파내려 간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묏자리를 발굴하기 전에 약식으로라도 인사를 드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날은 아무런 예고 없이 갑자기 누런 뼈가 나왔다.  

묘광의 흔적도 보이지 않은 곳에서 뼈가 튀어나와서 사람은 아니겠지 하면서 조금씩 드러냈다. 

그러다가 대퇴골이 나오면서 인골을 처음 마주하게 되었다. 

누런 뼈가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나의 첫 무덤 아닌 무덤.  

인골을 마주한 순간 신기하기도 하고 잘 못 할까 봐 무섭기도 하고 무엇보다 

경의로웠다. 

지금은 흙뿐인 이곳에 이 천년 전 사람이 살았음을 사람의 몸이었던 존재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묘광을 끝내 찾지 못했고 두개골도 확인되지 않았다. 뼈의 주인은 한쪽 팔도 뒤틀린 자세를 하고 있었다. 나머지 한 손은 동전 몇 푼을 쥔 채로. 그분은 어떤 사연으로 머리도 없이 이곳에 묻혔을까. 내가 발굴을 잘 못해서 묘광을 못 찾은 것 같아 한 참 동안 마음이 안 좋았다. 


나는 무덤은 다른 유구와 차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뼈는 다른 유물과는 달리 대해 줘야 한다. 

뼈는 분명히 한때 인격과 존엄이 있는 인간의 몸의 일부이고 무덤은 누군가가 이별과 슬픔, 눈물과 그리움을 묻은 곳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간이 지나도 이렇게 땅에 남는다. 설사 뼈가 모두 삭아 그저 무덤의 자리만 확인할 수 있을지라도. 

굳이 누군가의 조상이 아니어도 단지 그 과거의 주인공이기 때문이어서라도 뼈와 무덤의 주인에 대한 예를 갖추는 것은 고고학자로써 그리고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의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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