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파기 좋은 날 5
현장에서는 흙과 마주하는 시간이 많다.
유적이 만들어지는 과정 중 '퇴적 과정'과 '퇴적 후 과정'이 있다.
하나는 흙이 겹겹이 덮이는 축적 과정을 말하고
또 하나는 쌓인 흙 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활동을 일컫는다.
강가의 충적지라면 흙이 빠르고 두껍게 올라가고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서 모래 섞인 흙은 쌓임과 흩어짐을 반복하다 서서히 층위를 만들어 간다.
흙 안에서도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쥐가 다니기도 하고 나무뿌리가 파고들어 아래에 눌린 토기 조각을 띄어 올리기도 한다.
미생물이 균을 먹거나 만들어 내고
물이 땅에 스며들면서 식물의 작은 잔존*을 더 깊은 곳으로 흘려보내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있기 전 인간은 땅에 이런저런 변화를 준다.
땅을 파서 집을 짓고 무덤을 만든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다른 곳을 찾아 나서곤 하고
더 많은 해가 지고 떠오르면 그 무덤을 기억하는 마지막 한 사람마저 떠난다.
인간이 떠난 후 남겨진 땅은 바람과 물의 것이 된다.
나무가 아래로 뻗어나가면서 무덤 안에 있던 뼈의 위치가 자리를 벗어나고
집터 바닥에 있던 토기가 깨지고 이곳저곳으로 떠오른다.
비탈길에 세워진 무덤의 모서리가 해져서 깎여 나가고 흙이 덮인다.
물이 고였다가 빠지고 살이 썩어 흙과 뒤엉키다 땅으로 돌아간다.
발굴을 할 때면 나무뿌리가 여간 거슬리지 않는다.
'나무만 아니면 잘 남아 있었을 텐데'
'위에서 흙이 안 쓸렸으면 집의 지붕이 어땠는지 알 수 있었을 텐데'
우리는 늘 궁금해한다. 이 질문들이 최종 목적인 마냥.
무엇이 원래의 모습일까? 어떻게 증거를 찾을 수 있을까.
거스르고 싶은 시간의 흔적은 사람에게도 남는다.
갓난아기 때도 열다섯 자라고 있는 모습도 서른 다섯 출산 후 변한 몸도
쉰넷 주름이 자리 잡기 시작한 얼굴도 일흔여섯 하얀 머리가 다 자라도 모두 같은 사람이다.
유적도 그렇다.
살던 사람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나 흙이 위로 쌓이고 온전함이 서서히 사라질 때도
모두 같은 유적이다.
발굴은 단지 이 중 임의의 순간에 땅을 유적으로 봉인시킨다.
아주 오래전 이 땅에서 숨 쉬던 어르신의 쉴 곳과 누군가의 생활공간은
유적이라는 이름으로 나의 시간과 마주한다.
이 끝없이 이어질 수 있는 시간의 축 어딘가에서 나는 트라울을 잡고 서있다.
* 규소체 (phythol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