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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두선생 Aug 01. 2024

6화 아름다운 규칙

야구에서 절대절명의 승부구를 위닝샷(winning shot)이라고 한다. 중요한 경기를 마무리하려는 순간, 투수가 위닝샷을 던지고 스트라이크와 볼이 애매한 지점에 공이 살며시 걸쳐 떨어진다. 이때 포수의 절묘한 프레이밍(스트라이크처럼 보이게 공을 잡고 자세를 취하는 기술)이 더해져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외치고 타자는 멀뚱히 선 채로 경기를 마무리하게 된다. 야구는 아무리 공격을 잘해도 리드하는 팀의 투수가 마지막을 처리해야 끝나는 경기다. 조금 전 상황에서는 이기고 있는 팀과 관중이 열광하며 경기를 마감하게 된다. 경기에서 진 팀은 볼 판정이 애매해도 심판의 확신에 찬 콜 사인과 과도한 몸짓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엄하게 항의하다가 분위기를 망치면 경기에 진데다 욕까지 먹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상황이 올해부턴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포수의 플레이밍 기술에 설령 약간 속았다 하더라도 강한 확신으로 아웃 콜을 하는 심판의 권위가 심히 희석되는 제도가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그 제도는 KBO가 프로야구에 도입한 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ABS, Automatic Ball-Strike System)이다. 이는 구장에 설치된 4대의 카메라로 이루어진 트래킹 시스템으로, 투수가 던진 공의 판정을 매번 주심에게 송출하면 무선 이어폰으로 받은 정보를 외치는 방식을 말한다. 중계방송을 보고 있는 시청자는 포수 앞에 그려져 있는 스트라이크 존 에서 공이 표시된 상황을 보고 함께 판정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는 경계선에서 애매하게 빠진 공에 더 이상 심판의 자의대로 스트라이크를 선언할 수 없다. 또한 사람들이 익히 보아온 스트라이크의 궤적이 전혀 아닌데도 ABS 시트템이 존 안에 들어갔다고 판단하면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불러야 한다. 시즌 초에 메이저리그에서 귀국한 최고의 투수나, 리그 최고의 홈런 타자, 또는 감독들 모두 때때로 판정에 어이없어하는 경우를 보인 것은 직관적인 스트라이크의 모습을 벗어난 공에 내린 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삶이 그렇듯 스포츠는 공격과 수비가 공존하는 세계다. 타자일 때는 스트라이크 아웃 판정에 불만이 있어도, 그 공을 던진 투수는 만족할 수 있다. 물론 정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승부의 세계는 한쪽의 불만족이 다른 쪽의 만족이 되기에 새로 도입된 제도는 금방 균형을 찾고 안정화되고 있다. 오히려 심판에게 전적으로 의존한 기존 판정 제도가 인간이 지닌 한계 때문에 잦은 오심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점에서 새 제도의 도입은 긍정적인 면이 많이 부각되는 상황이다.      


이런 보조 판정 시스템이 처음은 아니다. 2018년 FIFA 러시아 월드컵부터는 VAR(Video Assistant Referees, 비디오 보조 심판)이 활용되어 그 판독 여부에 따라 희비가 교차되는 경험을 했고,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타자가 출루하거나 진루할 때 아웃, 세이프 판독에 비디오 챌린지가 사용되어 왔다. 테니스, 배구 등의 경기에도 비디오 챌린지는 이미 익숙한 보조 판독 방식으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전의 비디오 판독들은 심판이 우선 판정을 하고 난 후 이에 불만이 있는 팀이 요청해서 실시하는 것이라면 이번 ABS 판정은 그런 챌린지 방식이 아니라 투수가 던지는 모든 공에 매번 기계가 내리는 판단을 심판이 선언한다는데 큰 차이가 있다.      


즉,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제기하는 기회가 원천적으로 차단된 상황에서 기계가 내리는 판정을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판정에 포함된 인간미를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방식이다. 이 방식에서 비로소 심판은 기계가 내린 판정을 외쳐주는 보조적 존재가 되어버린다. 인간이 기계의 도우미가 된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공정함을 위해 기계에 의존하면서 잃어버린 낭만이 곧 인간 소외의 시작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얘기가 멀리 왔다. ABS 제도까지 얘기하게 된 데는 운동 경기에서 새로운 제도와 규칙이 도입되고 보완되는 과정을 통해 인간이 공정한 경쟁을 추구하며 행한 노력의 일면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야구만 해도 미국에서 최초의 프로야구팀이 창설된 게 1869년이었고 내셔널 리그는 1875년에 창설되었다. 근 150여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규칙이 정비되고 보완되었을까? 우스갯소리로 욕심 많은 타자가 공을 치고 바로 3루로 달리면 왜 안 될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공격과 수비의 상황에서 누구도 더 불리하게 만들지 않은 것이 운동 규칙의 묘미인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자.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세 개만 잡아도 타자를 아웃시킬 수 있다. 그러나 타자는 걸어 나가려면 볼을 네 개나 참아야 한다(베이스 온 볼스, 우리식으론 포볼). 이건 투수에게 유리한 볼 배정이다. 하지만 단순히 볼 개수로만 보면 안 된다. 초창기 야구에서 베이스 온 볼스는 ‘9볼’이었다. 그러다가 경기 시간 단축 요구와 투수들에게 유리한 조항(파울이 스트라이크로 처리됨)들이 생겨나면서 8볼, 7볼, 6볼로 줄다가 1889년에 마침내 지금과 같은 4(포)볼이 되었다. 스피드한 경기는 경기 흥행과 광고 수입에도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렇다면 좀 더 빠른 시합 전개를 위해 베이스 온 볼스를 3볼로 줄이면 어떨까? 각종 연습 경기에서 시험 삼아 실시한 결과는 대실패였다. 기대했던 경기 시간 단축은커녕 속출하는 베이스 온 볼스로 오히려 경기 시간이 늘어나 버린 것이다. 경기 규칙은 이런 지난한 과정을 통해 최적화된다. 그리고 또 시간이 흐르면 변한다.       


야구 경기는 다른 경기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어려운 규칙을 적용하고 있어서 실제로 경기장에 관람 온 사람들 중에 확실한 룰을 모르고 보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인필드 플라이, 낫아웃 등은 오랫동안 야구를 즐긴 나조차 헷갈리는 규칙이다. 축구 경기에도 오프사이드나 핸들링 반칙 등의 이해하기 까다로운 규칙이 있다. 농구나 핸드볼에는 없는 오프사이드가 있어 축구 경기 보기가 불편하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축구에서 오프사이드가 없다면 상당히 많은 공격수와 수비수가 골문 주위에 밀집해 혼란할 것이다. 원래도 그런 이유로 만들어진 규칙이다. 농구나 핸드볼은 경기장의 크기가 작아서 불필요한 규칙이기도 하다. 경기마다 어울리는 규칙은 따로 있다. 또한 공통된 규칙도 있다.      


왜, 타자가 3루로 달리면 안 될까? 야구 베이스런도 육상경기와 대부분의 트랙 경기들처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 때 육상은 시계 방향으로 달렸다. 1921년 국제육상경기연맹이 ‘모든 트랙 경기의 달리는 방향은 왼쪽’을 규정한 이후로 지금과 같이 되었다. 같은 조건에서는 시계 방향보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달릴 때가 기록이 더 좋게 나오는 효용의 측면에서 그렇고, 인간의 심장이 왼쪽에 있기 때문에 몸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오른손잡이는 오른발이 발달하므로 트랙을 돌 때 바깥쪽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가기 때문에, 또는 지구의 자전 방향에 맞춘 본능적인 편안함 등 많은 이유로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렇듯 하나의 규칙은 수많은 필요와 이유를 함의한다.    

  

우리는 프로스포츠 경기에 기꺼이 일정 비용을 지불하고 관람을 즐기며 승패를 수용한다. 일찍이 ‘스포츠 사회학’에서는 스포츠가 사회의 축소판으로서 사회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고 보았다. 특히 비판 이론적 관점에서는 스포츠가 대중매체에 의해 문화콘텐츠로 소비되기 때문에 대중을 불평등 구조에 순응하게 한다고 본다. 스포츠는 세상에 승자와 패자가 있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고착화시키고,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남성 중심의 경기, 흑인이 주로 선수로 참여하고 코치나 감독은 백인이 맡는 경우 등이 그렇다. 프로 스포츠의 포지션별 전문화는 도구적 이성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측면이며 승리라는 목적을 위한 분업화로 보는 시선도 있다. 이에 따라 능동적이고 자율적으로 경기에 참여하는 기능론적 측면이 도외시되고 스포츠의 놀이와 여가의 가치가 훼손된다고 본다(2023.10.10. 성대신문, ‘스포츠사회학, 스포츠에 내재한 사회적 의미를 탐구하다’ 중).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스포츠 경기를 보며 공정한 경쟁과 규칙을 수용하고 배운다. 정해진 영역에서나마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합당한 몫을 줄 수 있는, 공정한 분배의 이상이 실현되는 모습이 없다면 지켜보는 사람은 즐거움이 아니라 짜증과 불평을 느낄 것이다. 그것은 경기장 밖의 현실 상황과 다를 게 없는 답답한 장면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때때로 스포츠 경기를 보며 느끼는 환희와 감동은 드라마틱한 역전과 성공한 선수들의 인생 스토리 등도 있지만 그 속에는 승자와 패자가 모두 인정할 수 있는 정교하고 공정한 규칙들에 대한 경의(敬意)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스포츠 경기 규칙처럼, 우리 사회도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제도와 규칙에 관한 구성원들의 오랜 협의와 공론화 과정이 가능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제도와 규칙을 존중할 수 있는 풍토가 마련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다음 화에선 교육 분야에서 그런 노력들로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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