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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현복 Aug 18. 2023

거울 앞, 보는 나는 누구인가?

인생극장, 그래 결심했어!

드로잉_B8_oil on paper_34x24.5cm_2023

 나는 누구인가? 내 앞에 펼쳐진 세상과 나를 보는 사람들, 내가 보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나는 그들의 생각을 알 수 없다. 내 생각만이 있음을 안다. 내가 인식하는 것과 남들이 인식하는 것 또한 다르다. 꿈 역시 그렇다. 꿈은 나에게 체험된 생생한 인식이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내 꿈을 볼 수도 없고 설명도 되지 않는다. 보고 듣고 생각하고 인식하는 그야말로 나를 나로서 체험하는 주체는 무엇인가?  내 생애 이 질문이 처음 시작 된 것은 다섯 살쯤 어린아이 시절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언어능력이 있어 구체적인 질문을 삼을 수는 없었지만 표현할 수 없는 그 답답함의 정도는 지금과 별반차이가 없다. 그렇게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는 누구야?"

"누구긴 누구야 ㅇㅇ이지~"

주방일을 하다 말고 나를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아니, 그거 말고 나는 누구야?"

"우리 예쁘고 소중한 엄마의 아들이지"

이내 나는 말문이 닫혔다. 사랑이 가득 담긴 젊은 엄마의 눈빛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엄마의 그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다. <나는 나를 보지 않고도 나를 인식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엄마를 보고 있음에도 엄마를 인식할 수 없다. 나는 나를 체험하고 있지만 나는 엄마를 체험할 수 없다! 충격이다. 왜일까?> 내가 엄마가 아니니까 엄마를 체험할 수 없는 게 당연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 괴리감이 답답하고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나를 나로 인식하는 나는 누구인가? 그 내 안에 존재는 무엇이며 내가 체험하는 세상은 무엇인가? 많은 철학자들과 종교인들, 예술가들과 과학자들 역시 오래전부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한 통찰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육체와 마음, 그리고 영혼을 나누는 영혼육 개념을 비롯해 심리학의 자아와 초자아 의식과 무의식, 교감 부교감의 자율신경계와 뇌과학의 세포 생물학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분야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과 연구는 현재진행형이다.


 독일 유학시절 한참 언어를 배우던 중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미래의 어떤 모습을 우리는 <꿈을 꾼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잠을 잘 때 꾸는 것도 <꿈을 꾼다>라고 표현한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독일어로도 꿈을 꾼다는 동사 träumen을, 영어로도 꿈을 꾼다는 동사 dreaming을 <잠을 잘 때>와 <커서 뭐 될래>할 때 꿈을 같은 단어로 사용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동서양의 서로 다른 문화권인 나라와 민족들에서 잘 때에 꾸는 꿈과 되고자 하는 욕망인 꿈을 동시에 같은 '동음이의어'로 표현하고 있을까? 그 둘의 개념은 서로 다른 대도 말이다. 그 이유를 여러 가지 논리로 추측은 할 수 있겠으나 나는 아직 그 궁금증을 명쾌히 풀지 못했다.


 한편 자라면서 느낀 바는 세상은 마치 꿈처럼 나의 의지대로 시시각각 변한다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도 환경도 분위기도 내가 느끼고자 하는 대로 바뀐다. 어떤 사람은 내가 듣고자 하는 말을 미리 상상했을 때 정확히 그 대답을 해주기도 한다. 그런 일은 비일비재했다. 또 먼저 누군가의 안부가 궁금하고 그를 만나고자 머릿속에 그리면 갑자기 그 사람을 만난다. 또 불길한 예감에 빠져 두려운 감정으로 머릿속에 드는 어떤 생각은 이내 현실에서 벌어지고야 마는 일이 많았다. 이런 현상은 칼융이 설명하고자 했던 동시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서로 인과 관계가 없는 사건을 마치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처럼 느끼는 현상을 동시성(Synchronicity)이라 명명했다. 아무래도 인간 머릿속의 생각과 감정이 현실 세상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생각한다. 지각이 발달하면서 나와 남을 구별한다. 그때의 나는 위에서 말하는 진짜 내가 아닌 남과 구별된 ㅇㅇㅇ라는 캐릭터다. 그 캐릭터를 나라고 여기며 고유한 성격을 형성하고 산다. 누군가의 아들 딸, 남편과 아내, 학생과 직업인 등으로 우리를 사회적으로 구별하며 그 캐릭터를 한평생 연기하고 살고 있다. 또  그렇게 스스로 부여한 자신이라는 캐릭터가 진짜 자기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일까? 과연 그게 고유한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종종 문득 돌아 서서 내가 누구인지 질문한다. 마치 게임 속 주인공이 여기 지금 내 몸에 접속한 계정 주인이 누구지?라고 질문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 자라오면서 내가 만들어낸 나라는 캐릭터는 어쩌면 내가 아닐 수 있다. 그저 세상의 구성원으로서 현실에 존재하기 위한 구별된 존재일 뿐이다.


나와 남을 구별하는 지각이 발달하는 시기인 4~5세 어린아이 시절 내가 느꼈던 괴리감은 그저 발생된 게 아니었다. 말인즉슨 미성숙한 아기일 때 인간은 남과 나를 구분 짓지 못하고 어쩌면 그것은, 처음부터 우리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하나의 존재에서 파생된 존재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한그루의 나무에 수많은 나뭇잎이 달려있다 해서 그 나뭇잎들을 모두 다른 잎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나무로 보듯이 나를 있게 한 부모님과 조상 또 그 윗조상과 태초의 인간까지 올라가 보면 결국 하나에서 출발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인생의 3분의 1에 달하는 시간을 꿈속에 있고 현실에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꿈이라 부르며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살고 있는 우리는, 결국 진짜 거대한 꿈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이 꿈을 깨는 순간 그 모든 시간과 공간이 하나의 매트릭스와 같은 게임 속이였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 전까지 중요한 건 내가 이 게임에 얼마나 몰입하고 있는가 이다. 내게 주어진 인생 게임 속 스토리에 전념하고 즐기며 각종 스테이지를 잘 클리어해 나갈 것인가, 모든 게 게임일 뿐이라며 접속이 언제 끝날지만 따분하게 기다리다 말 것인지 말이다.



드로잉_B7_oil on paper_34x24.5cm_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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