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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사라 Mar 03. 2022

딱 한 장만 넘기면..

검정고시 출신 문제아에서 변호사로

내가 금수저 입에 하나 물고 나와 말하기 처음부터 변호사 될 상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실은 완전히 그 정반대다. 오늘도 마음 한편 헤매고 있을 20대 취준생들과 제2의 삶을 꿈꾸는 직장인들을 위해 내가 변호사가 된 과정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나는 소위 개천에서 뭐(?...내가 용까지는 아니라서;;) 난다고 하는 케이스랄까? 여하튼 그랬다. 긴 이야기를 짧게 하자면, 난 고등학생 때까지 집 안에 화장실이 없었다. (80년대가 아니다. 2000년대 초반이다) 저소득층으로 학비 면제를 받았고 이마저도 다 마치지 못하고 검정고시로 고등학교를 패스했다. 대학에 가서는 한 번도 등록금을 낸 적이 없고 대학원 진학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돈을 벌어야 했기에 졸업 학기인 만 23살에 중소기업에 취업했다.

홍보회사에 들어갔는데, 당시 회사 생활은 말 그대로 핵불닭볶음면에 스프 2개를 추가한 맛이었다. 한 달에 350시간씩 일을 했으니... 현재 법정 근로시간의 거의 두 배가 되는 시간이다. 중소기업이어도 회사에서 직원 복지를 위해 회사 옆 건물 피트니스센터 회원권까지 제공한다고 좋아했는데, 직원들이 밤새 일하고 거기서 샤워하고 다시 출근하는 용도로 쓰고 있단 사실을 출근한 지 며칠 못 돼서 알게 됐다. 매일 울면서 출퇴근을 했던 것 같다. 어느 날, 다른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밤 12시가 넘은 시각에 좀비 같이 일을 하고 있는데, 문뜩 주변이 보였다. 왼쪽에는 입사한 지 10년 된 부장님이, 뒤쪽에는 20년 된 이사님이 있었다. 그때였던 것 같다. 가슴 깊숙이 ‘이건 정말 아닌 것 같다. 뭔가 해야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

그런데 어떻게 변호사? 사실 이건 생각도 못 해본 일이다. 살면서 내가 고시를 볼 거라고는, 아니 더 정확하게 그런 걸 공부해서 될 수도 있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나 스스로를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 근처에는 가보지도 않았다. 나는 검정고시에 지방대 출신 아니던가... 어떤 종류의 국가고시이든 관련 책 한 번 들춰본 적도 없었다. 내 주변에 그런 사람 구경도 못했다. 이건 그냥 ‘별나라’ 얘기였다. 이직 정도를 생각했던 것 같다. 평생 직장생활...? 휴... 이건 어딜 가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가슴만 답답했다.

그러던 중 오랜만에 학교 선배를 만났다. 국회의원 보좌관을 하던 선배였는데, 대학 시절 나도 거기 가고 싶다고 했다가 ‘너 와봤자 커피밖에 안 탄다.’며 나를 말렸던 선배다. 그 선배가 뜬금없이 ‘나 로스쿨 준비하고 있다.’라면서 ‘너도 한 번?’ 이러는 거다. 말도 안 된다고 내가 무슨.... 이러면서 손사래를 쳤더니, 선배는 ‘아 그래? 그냥 시간 될 때 기출문제 한 번 풀어보지.’라고 시큰둥하게 말한다. 참내, 그게 그렇게 쉽게 말할 일인가? 그러고는 잊어버렸다.

그날은 퇴근이 좀 빨랐다. 퇴근해서 집에 오니 밤 10시. 그때, 뜬금없이 "시큰둥"했던 선배 표정이 생각났다. ‘기출문제? 한 번 풀어볼까? 풀어본다고 뭐. 그냥 한 번~ 아니면 말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시큰둥하게 졸린 눈을 비비며 기출문제를 프린트했다. 구경이나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나랑 동떨어진 이야기라고, 그러니까 쳐다보지도, 쳐다볼 일도 없다고 했던 일. 스스로 경계선을 그어 놓고 나 자신에게 ‘여기부터는 너는 못 넘어가’라고 했던 그 경계선을 넘는 순간이. 그냥 한 페이지만 열면 됐다. 그때부터는 모든 일이 그랬다. 그런 마음이었다. 그냥 한 페이지만 일단 넘겨보자. 아님 말고.

(물론, 마법처럼 모든 게 짠 하고 바뀐 건 아니었다.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이 얘기는 다음 글에서 더 해보려고 한다.)

스스로 바운더리를 만들 것 없다는 이야기.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남들 다 하는 뻔한 동기부여 류의 또 그런 소리?!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 주먹 꼭 쥐고 ‘경계를 뛰어넘자!’ 이런 결심? 이런 거 하란 말이 정말 아니다.

뭐 이런 엄청난 결심 같은 거 하지 말라고. 그런 거 할 거 없다고. 지금 그렇게 비장하게 뭘 할 에너지도 없다는 거 나도 잘 안다고. 그냥 아님 말고 이런 마음으로 뭐가 됐든 딱 한 페이지만 넘겨보라고. 일단 슬쩍 간만 한 번 봐 보라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거다.

그래서 변호사가 됐고, (요즘 변호사 3만 명 시대에 먹고살기 힘든 변호사도 부지기수인데 그게 뭐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다. 그래서 미리 방어하는 차원에서 이러고저러고 앞에 서론을 길게 늘어놓은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글 끝머리에 든다.) 서른하나 이른 나이에 내 이름을 걸고 사무실을 냈고, 돈 잘 버는 변호사에서 새로움을 찾아 연예기획사 대표이사로 직업도 바꿔봤고, 지금은 내 손으로 오롯이 아이를 키우면서, 하루에 한두 시간 일하는 것만으로도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고 있다.

묻고 싶다. 혹시 지금 푸세식 화장실이 딸린 집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살아본 적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 당신의 출발점은 나보다는 훨씬 낫다. 그니까 그저 시큰둥하게, 아님 말고, 그냥 이런 마음으로 딱 한 장만 넘겨봤으면 한다. 그렇게 힐끗 옆도 보고 위도 봤으면 한다. 안된다는 생각 잠시 접고 그렇다고 된다 우렁차게 외칠 필요도 없이.. 그냥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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