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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사라 Mar 27. 2022

패배의식 극복방법

내 안의 코끼리 달래기

나도 알고 싶다. 패배의식을 단번에 극복하는 방법이 있을까? 패배의식의 사전적 정의는 이렇다. ‘성공이나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없어서 일을 쉽게 포기하거나 미리 패배를 예상하는 의식’ 그렇다면, 극단적인 성취감을 경험하게 되면 자신감이 붙지 않을까?

     

나는 문제아였다. 사내아이처럼 바짝 깎은 짧은 머리를 노랗다 못해 하얗게 탈색한, 전형적인 문제아. 고등학교 1학년을 간신히 마치고 2학년에 올라가 얼마 되지 않아 학교를 자퇴했다. 아버지 아는 분이 나 같은 청소년들을 몇 명 거두어 필리핀에서 공부를 시키고 있는데 자신이 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제안했다. 당시 내가 감당이 안 됐던 우리 부모님에게는 아마 희소식이었을 것이다. 고등학교 학비도 못 낼 형편이었다면서, 어떻게 유학이냐고? 그러니 그곳 환경이 어땠겠는가. 아이들을 컨트롤 하겠다고 밖에서 방문을 걸어 잠그는 그런 곳이었다. 거기서 죽을뻔한 큰 사고가 있었다. 나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곧 한국으로 돌아왔다. 말 그대로 ‘살아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렇게 1년을 날려 보냈다. 검정고시를 본 게 그 이듬해 4월이었다. 그래도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대학은 갈 생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갈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스스로 포기한 상태였다.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오르던 반항심도 시간이 지나면 풀이 죽는지, 아니면 죽음의 문턱을 넘고서는 순해진 것인지, 지방 전문대라도 좋으니 대학에 입학만 해달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눈빛에 마음을 돌려 잡았다. 그러고는 곧장 다니던 고등학교 옆에 있는 재수학원과 독서실에 등록했다. 그러고 보면, 그때부터 뜬금없이 독한 구석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린 마음에 자존심이 상해 학교 친구들을 피해 다닐 법도 한데, 나는 오히려 나 자신에게 자극을 주려고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수능까지 남은 시간은 6개월. 첫 모의고사 성적표를 들고 학원 담임과 면담을 했다.      


“선생님, 저 C대 사진학과에 가고 싶어요.”     


나는 미술 쪽엔 어려서부터 전혀 소질이 없었다. 미술 성적 ‘미’ 받는 건 정말 드문 일인데, 그 힘든 걸 나는 자주도 해냈었다. 그 정도로 그쪽과는 맞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사진? 그때 당시 내 의식의 흐름은 이랬다. ‘나는 기자가 되고 싶다. 기자가 되려면 신문방송학과에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지금 성적으로는 힘들 것 같다. 사진기자라는 게 있네?! 그럼 사진학과에 가자. 거긴 신방과보단 해볼 만 한 것 같아’ 나는 내 나름 현실에 맞게 목표를 적당량 조정해 말한 거였다. 그런데 그 얘길 들은 선생님 입가 한쪽이 삐쭉 올라갔다.

     

“응? C대? 어.... 그래~~~ 뭐... 가면 좋지.”      


선생님 표정을 본 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고 가슴에 뭔가 뜨거운 게 울컥 올라왔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럴만한 반응이었다. 당시 내 모의고사 성적이 400점 만점에 100점대였다. 지방 전문대도 잘 골라야 입학할 수 있는 성적이었다. 그런데 어찌나 자존심이 상하던지 그 후 면담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수능 성적표가 나오고 딱 한 번 찾아갔는데 입학 면담을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흥, 이것 봐라. 안된다며~ 메롱~’ 이런 목적에서였달까.      


6개월간 드라마틱하게 성적이 올랐다. 매달 모의고사마다 몇십 점씩 성적이 올랐고 실제 수능에서조차 마지막 모의고사보다 점수가 올랐다. 특히, 언어영역은 당시에 만점 받은 학생은 없었고 1개 틀린 사람이 전국에 3명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나였다. 수능 성적표를 들고 위에 말한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선생님이 멋쩍은 얼굴을 하며 S대 이야기를 꺼냈다.   

  

“싫은데요? 선생님이 C대 가면 좋~~~~지 라면서요. 저 거기 갈거에요.”     


아, 이것도 달래지 못한 내 패배의식, 열등감의 결과다. 복수심에 불타올라 선생님 약 올리려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다니... 우리 부모님조차 내 뜻을 꺾지 못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대학에 안 가겠던 애 아니던가. 사실, 부모님은 사는 데 쫓기느라 대학 입시나 교육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관련해서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진짜 문제는 주변에 제대로 조언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누군가 옆에서 조금만 이야기해주고 궤도를 수정해주면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그럴 사람이 없는 거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더 큰 문제는, 바로 ‘현실적인 조언’ 이다. 나는 청소년들에게 하는 현실적인 조언은 자라나는 나무에 독을 뿌리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학교 선생님들이나 선배 등 주변 사람들이 ‘너를 생각해서’ 해준다는 그 적당한 조언이 날개를 펼칠 기회조차 꺾어버린다. 다른 아이들도 나처럼 누군가의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 오히려 독기가 올라 치고 올라가면 좋을 텐데, 웬만큼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고선,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저 맥없이 꺾여버린다. 그런 게 늘 안타깝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가면, 사실 내 수능 성적이 어느 수준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다만, 당시 우리 학교에서 수능 상위 3% 이내이면 무슨 ○○ 장학생이라고 해서 (이름은 정확히 기억 안 남) 4년 장학금을 지원했는데, 내가 입학할 때 그 장학생이었다. 그래서 내 성적이 그랬구나 어림짐작할 뿐이다. 거기에 더불어, 입학식을 며칠 앞두고 학교에서 예정된 시간보다 1시간 일찍 오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때 내가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단 사실을 알았다.     


이게 내 극단적인 성취 경험 스토리다. 그래서 나의 패배의식은 극복됐을까. 대답은 '아니'다. 내가 성취한 게 얼마나 대단한지, 극단적이었는지에 상관없이 여전히 이놈의 열등감은 ‘방 안의 코끼리’ 처럼 늘 내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금연에 대해서 누군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담배는 끊는 게 아니라 참는 거라고.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패배의식 극복은 마치 담배를 끊는 것 아니, 참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조금씩 쌓여가 마음 깊은 곳에 굳건히 자리 잡은 패배의식, 열등감은 바위처럼 좀처럼 부서지질 않는다. 수시로 불쑥불쑥 얼굴을 내민다. 그저 매일 수행하듯, 어린아이를 어르듯 내 안의 코끼리를 달래는 수밖에 방법이 없다. 내 경험상, 이 코끼리는 무시하고 고개를 돌리면 늘 존재감을 더 드러낸다. 없다고 치부해버리면 마음 가득 커져 버려서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 만든다. 이 사실을 깨달은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내가 나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털어놓을 수 있게 된 것도 다 내 안에 코끼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공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 글에서는, 분위기를 좀 바꿔서 내가 했던 공부 방법을 장기 계획과 단기 전략으로 나눠 이야기해볼까 한다.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늘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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