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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록별 마실 Oct 25. 2024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돈

숫자로만 존재하는 돈 이야기

 요즘 세상에서 살고 있는 나의 동족들은 종이나 금속으로 태어났지만 지갑이나 주머니에 거주하는 경우가 크게 줄었다. 동전이라고 불리는 둥근 금속도 무겁다는 이유로 아이들조차도 주머니에 잘 넣어 다니지 않는다. 오히려 사무실 서랍 속 플라스틱 명함 상자에 오랜 기간 감금당하면서 서랍을 열 때마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만 내며 사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종이로 태어난 동족들도 지갑에 여러 명이 한꺼번에 모여 있으면 지갑이 너무 두꺼워 옷맵시가 나지 않고 무겁다는 이유로 기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심지어 돈이 씀씀이가 커졌다며 한국은행에서 예전의 다섯 장이 한 장으로 묶여 태어난 친구들도, 명절 용돈을 주는 경우 외에는, 지갑 속에 한꺼번에 많이 거주하지는 않는다. 그 또한 두께가 부담스러워서이다.


 영화 메트릭스에서 '네오'가 실험실 같은 곳에 있는 의자에 앉으면 몸은 그대로인데 정신은 가상세계로 이동하여 엄청난 스피드의 액션을 선보인다. 요즘 우리 돈은 태어날 때는 종이나 금속의 모습으로 태어났지만 은행 금고에 감금 아닌 감금되어 있는 경우가 정말 많다. 우리 돈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있는 것'으로 여기는 '숫자' 모습으로 은행이나 신용카드회사 같이 돈으로 돈을 버는 회사의 중앙 전산서버라는 가상세계에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육신은 실험실 의자에 있으나 정신은 전산시스템에 데이터로 존재하니 말이다. 인간들은 이런 모습의 우리를 '예금'이라고 부른다.

 가상세계에 사는 '숫자'가 현실세계로 나오는 주요 통로는 은행 ATM이나 은행 창구이 지폐계수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기회에나 태양빛을 잠시 구경할 기회가 생긴다.


  요즘 사람들은 우리를 지갑에 불과 몇 장만 넣고 다녀도 별 불편이 없는 것 같다. 평소 데이터의 모습으로 가상세계에 있다가 버스를 탈 때 교통카드를 통해 다른 사람의 '예금'으로 '숫자'만 이동한다.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으면서 다름 사람의 지갑으로 초당 약 30만 km의 속도로 이동하는 신공을 보인다. 식당에서 친구와 밥을 먹고 돈을 내야 하는 경우에도 밥 먹은 사람 대신 신용카드회사가 먼저 식당 주인의 '예금'으로 빛과 같은 속도로 '숫자'를 옮겨주면 그만이다. 신용카드회사가 먼저 이동시킨 '숫자'는 한 달 남짓 뒤에 밥 먹은 사람의 '예금'에서 다시 '숫자'를 가져온다.


  이런 숫자의 순간이동을 인간들은 참 좋아한다. 백화점 명품매장에 전시된 가방도 신용카드회사가 먼저 이동시켜 주는 '숫자' 덕분에 용기를 내어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예전 재래시장에서 구깃해진 종이돈을 주고받던 것에 비하면 너무도 달라졌다. 이런 편리하고 중독성 있는 거래시스템 덕분에 자신이 받을 월급 보다 더 큰 '숫자'를 신용카드회사로부터 청구받는 경우도 있다.


 지갑이나 주머니에 종이나 금속 형태로 있을 때 보다 '숫자'로 있을 때가 더 많은 횟수로 더 많은 '숫자'가 옮겨 다니는 것이 분명하다. 돈의 씀씀이가 커졌음이 분명하다.


버는 방법은 예전처럼 힘들지만 쓰는 방법은 확실히 편리해진 세상이다.

자동차로 고속도로를 지나기만 해도 내 것이었던 '숫자'가 도로공사의 예금으로 순간이동하니 말이다.


<사진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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