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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뽑아도 되니까 빨리 알려만 줘요

당신은 우리와 함께할 수 없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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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게 된 목적 :


alookso 에세이 쓰기 모임 시리즈 두 번째, 지난 번에는 [글]을 소재로 이야기를 써보았다면, 이번에는 [일]을 소재로 이야기를 써 본다. 일이라는 주제를 놓고, 각자 갖고 있는 의미와 이미지가 있겠지만, 나에게 [일]이란 육체적 생존보다는 정신적 생존, 다시 말해서 경제적 곤란보다는 정체성의 혼란이 중요한 문제였다. 어떻게든 돈만 벌면 그만이지 싶은 마음이 들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나를 어떻게 한 마디로 소개해야할까 라는 주제가 나에게는 더 유의미했다. 나에게는 오지 않을 줄 알았던 불행의 쿨타임이 돌고 돌아, 어느덧 나에게 찾아온 실직은 꽤 충격이 컸다.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내 문제가 되면 얼마든지 달라지는 법. 실직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 한번 들어보실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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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얼룩소에서 진행하는 [얼에모], 얼룩소 에세이 쓰기 모임에 참가하는 글입니다. 소재 다섯 개(글 - 일 - 돈 - 쉼 - 나)에 대해 한 달에 2회가량 글을 쓰고, 서로의 글을 합평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경어체를 사용하던 평소와 달리 부득이 평어체를 사용하게 됨을 양해 바랍니다.



=====


안 뽑아도 되니까 빨리 알려만 줘요


0.

가장의 무릎은

가장 쉬웠어요


일, 다른 사람을 위해 투자한 시간의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얻는 것. 하루의 1/3을, 많게는 1/2을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지만, 정작 일하고 싶어서 일하는 사람은 만나보기 드물다. 하기도 싫은 일을 왜 하느냐 물어보면, 대부분 일하는 목적이 일 내부보다는 일 외부에 있다. 업무 능력을 인정받아 조직에서 승진하기보다, 금전적 보상을 통해 누리는 행복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 대충 산술적으로 계산해서 내 시간의 1/3을 다른 사람을 위해서 대신 쓰는 대가로 1/3의 여가 생활과 1/3의 수면을 허락받는다고 보면 될까. 여기에 덧붙여 지켜야 할 부양가족까지 있는 경우, 여가 생활마저 일부 침해받는 꼴. 사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면 가장 좋겠지만, 좋아하는 일을 찾기도 쉽지 않다. 일하기 싫어도 생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텨내게 되는 까닭.


지켜야 할 부양가족은 더러운 꼴을 보아도 질끈 참게 만든다. 하늘 높은 줄 몰랐던 자존심의 무게는 나와 부양가족의 생존보다 훨씬 가볍기에. 무릎을 꿇게 만드는 가격은 언제부터 이렇게 값싸졌는지. 어쩌면 원래부터 싼 가격이었는데, 나만 모르고 있었는지도. 몇 년 전, 사람 귀한 줄 모르는 직장 상사 앞에서 한없이 값싸져 버린 우리 아버지의 무릎 이야기에 하루 종일 분노와 무력감이 치밀어 올랐다. 평생 회사에 헌신했을 뿐인데, 우리 아버지에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함께 욕하고 화내며, 정말 더러운 꼴 보느라 고생 많으셨다는 공감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덕분에 우리 아버지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깨닫게 되었으니 감사하다고 말해야 할까.


자식 세대가 더러운 꼴을 덜 보게 하려고 희생했던 아버지의 삶을 존경한다. 하지만 나보고 아버지처럼 살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나는 도무지 자신이 없다. 물론 나에게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있었다면, 나 역시 아버지처럼 굽신굽신하면서 살지 않았을까. 부양해야 할 가족이 없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나는 부러지면 부러졌지 굽히진 않겠다는 소신을 빙자한 고집을 부려가며 살았다. 더러운 꼴은 덜 보고 사는 게 오히려 아버지의 뜻에 따르는 게 아닐까? 라는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하면서. 아버지의 삶을 생각하면 할수록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이제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의 자랑이 될만한 것 같진 않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물론 부모님의 자랑이 되지 못한다는 내가 느끼는 중압감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압박감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오셨겠지만.


이제 무릎만으로는 버티기 어려워지고 있는 시대임을 체감한다. 비용 감축이라는 명목으로 기존에 경력자가 하던 일은 값싼 인력이 대체한다. 직장에서 생존하면서 익혔던 각종 노하우는 점점 가치를 잃어가고. 인간이 하던 단순노동은 점점 기계가 대체하니, 취업 문은 더욱 좁아진다. 일하고 싶어도 마땅한 일자리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사회에 발을 내딛는 청년들의 점점 늦어지는 첫 취업 시기를 보며, 나는 20대 중반에 일을 시작이라도 할 수 있었음에 얼마나 감사했던지. 타인의 불행을 지켜보면서, 나에게 그 불행이 일어나지 않았음에 안도하며 감사하고야 마는 나란 인간. 굽신거릴 줄도, 무릎 꿇을 줄도 모르고 겁 없이 살았던 나. 쿨타임이 돌아 나에게 불행이 찾아올 줄은 몰랐겠지. 실직이라는 불행이.



1.

탓할 대상이라도

있어줘서 고맙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사람, 아담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평생을 노동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고통을 주었다. 왜 자신이 노동의 고통 속에 있어야 하는지 답답해하는 사람에게 아담의 이야기는 남 탓, 정확하게는 조상 탓하기 딱 좋은 소재가 되었다. 어린 시절 여름성경학교에서 한 번쯤 듣게 되는 이 창세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늘 아담을 원망했다.


왜 먹지 말라는 걸 먹어서 자신과 후손들을 고통스럽게 살게 했느냐고. 하지 말라는 건 좀 안 하고 살면 어디가 덧나는 것인지. 기어코 하고 싶었으면 허락받거나, 허락받기 힘들 것 같으면 왜 하면 안 되는지 물어나 보던지. 허락보다 용서가 쉬울 줄 알았나. 몰래 하려면 걸리지나 말든지.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지만, 노동은 인류의 조상 때부터 쭉 존재하던 고통이니, 나도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달하면, 어느새 운명에 수용하고 체념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문득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노동하지 않으면 굶어 죽는 공포가 클까, 아니면 정체성을 잃는 공포가 클까? 평생 노동하지 않으면 먹을 것을 얻을 수 없기에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던 아담이 들으면 코웃음 칠 일이겠지만, 나는 후자가 더 컸다. 설마 그깟 일 조금 안 한다고 굶어 죽기야 하겠나 싶은 호기로운 마음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에게 나를 백수라고 소개하는 게 너무 막막했다. 아니, 부끄러웠다고 말해야 좀 더 정확하겠지.


일을 쉬게 되니, 아니나 다를까 경제적인 곤란보다 정체성의 혼란이 더 힘들었다. 회사 다닐 때는 어떻게든 시간을 아껴가며 사람 만나는 걸 좋아했지만, 시간이 많은 백수 시절에는 오히려 어떻게든 사람 만나는 기회를 회피하고 살았으니 말 다 했지.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말에 그저 별일 없이 산다고 말하는 게, 어찌나 거짓말 같아서 말하기 힘들던지. 일자리란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생존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회적 생존까지 포함하고 있음을 그땐 몰랐다. 결핍이 필요를 만든다는 말, 역시 없어 봐야 존재를 인지하는 게 인간인 법.




2.

안 뽑아도 되니까

빨리 알려만 줘요


일을 잠깐 쉬면서 재충전하려고 했던 계획은 예상치 못한 코로나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무산되었다. 아, 코로나 덕분에 나의 실직이 명예로운 죽음으로 포장되었으니 오히려 코로나에 고맙다고 해야 하나. 더 이상 쉬면 안 되겠다 싶을 때까지 쉬다가, 다시 일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내가 마음먹는다고 해서, 나의 삶은 내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회사가 전쟁터라고? 밖은 지옥이다! 라는 미생의 대사가 확 실감하였으니. 하긴 내가 사장이래도 나보다 훨씬 젊고 유능한 인력을 쓰겠다 싶은데.


점점 어려워지는 재취업 앞에서, 초라해진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한 줄 한 줄 붙들어 본다. 까짓거 내 이력서가 초라하지, 내가 초라하냐 싶은 마음으로 잠시 정신 승리를 외쳐보지만, 그것도 잠시. 어떻게 해야 이 초라한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더 채워 넣을까 싶어 마음에도 없던 영어 시험공부를 다시 시작해보다가 그만두기도 했다. 신입으로 들어갈 것도 아닌데, 이런 스펙 준비가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서. 우선 최대한 기존 경력을 살리는 방안으로 준비하면서, 스펙이 필요하면 따로 채워나가는 게 더 낫겠다 싶어서. 어쩌면 나는 아직 배가 덜 고팠나 싶은데.


회사의 규모가 크면 인사담당자가 따로 있기도 하지만, 규모가 작으면 실무를 담당하는 팀장이 직접 인력을 뽑기도 한다. 자기가 꾸려갈 팀원을 직접 뽑는 게 사실 더 실용적이기도 하고. 우연히 그 팀장이 지원자들의 서류를 검토하는 모습을 옆에서 보게 되었다. 서류를 검토하면서 회사에 필요하지 않은 인력을 대상으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빨리 탈락을 통보하는 모습을 보았다. 굳이 그렇게까지 빨리 통보할 필요가 있냐고 여쭤봤는데, 돌아온 대답. 그래야 이 사람도 빨리 다른 자리 알아볼 거 아니냐고. 나는 백두혈통도 아닌데, 과연 내가 회사를 배려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처럼 역지사지가 이렇게나 어렵다.


재취업하는 과정에서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의외로 탈락 통보가 아니었다. 오히려 탈락 통보라도 받으면 감지덕지. 더 이상 그 회사에 미련을 갖지 않아도 되니, 시간까지 내어 탈락 통보 메일까지 보내준 회사에 고맙기까지 했다. 비록 전형적인 멘트를 복붙해서 보내주긴 했어도. 결과를 통보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시간이 지났음에도 뽑을지 말지 통보해 주지 않는 회사, 합격한 사람에게만 통보한다는 내용을 모집공고에 써놓지 않는 회사, 지원했는지 기억조차 안 날 정도로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서류전형에 통과했음을 알려주었던 회사. 이렇듯 역지사지는 생각보다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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