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글자 시리즈 마지막 에세이, 이번 소재는 [나]. 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펼쳐볼까 하다가 세 가지를 준비했다. 하나는 [나]라는 글자에 대한 단상을, 하나는 나의 뿌리인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은 엉뚱한 나를 좋아하게 되었던 까닭을 설명해 본다. 사람마다 나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에 따라 나를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그것은 [생각]이었다. 뭔가를 배울 때마다 늘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때로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느려터진 내가 답답할 때도 있지만, 어떡하겠나. 이게 나라는 사람인 것을. 나에 대해 다룬 이야기를 보고 싶은 분은 바로가기의 링크를 통해 전문을 참고하시라.
이 글은 얼룩소에서 진행하는 [얼에모], 얼룩소 에세이 쓰기 모임에 참가하는 글입니다. 소재 다섯 개(글 - 일 - 돈 - 쉼 - 나)에 대해 한 달에 2회가량 글을 쓰고, 서로의 글을 합평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경어체를 사용하던 평소와 달리 부득이 평어체를 사용하게 됨을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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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머그잔에생각을 담아보다
0.
나라는 머그잔에
생각을 담아보다
나, 멍하니 이 글자를 바라보았다. 이 글자는 곧은 선으로만 이루어진 글자라 그런지 꽤 강하고 굵은 느낌이 있다. 왼쪽과 오른쪽, 아래는 모두 막혀 있지만, 위가 뻥 뚫려 있어서 우두커니 지켜보고 있자면 살짝 머그잔같이 생겼다는 생각도 든다. 머그잔에 물을 담으면 물잔이 되고, 커피를 담으면 커피잔이 되는 것처럼 [나]에 무엇을 담았느냐에 따라 나의 정체성이 결정되는 것은 아닐까.
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가장 근본을 찾아본다면, 제일 먼저 [생각]이 떠오른다. 내 안에는 생각이 담겼다. 그것도 나만의 생각이. 나는 생각하는 걸, 그리고 그 생각을 현실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날 때마다 계속 끊임없이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예전에 알던 무엇과 비슷할까 혹은 닮았을까를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내가 알던 것과 연결 지으려고 애쓰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즐겁다.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것도 이런 맥락이 있었던 탓일까.
타고나길 생각이 많았던 것일까, 생각을 많이 하다 보니 생각하는 게 익숙해서일까. 일단 저질러 놓고 나서 생각하는 사람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세월이 성숙함을 만들어줬던 까닭인지,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경험이 쌓이다 보니 어느 정도 스스로 삭히면서 넘어가는 게 이제는 가능해졌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많은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충분히 고민한 후 결정하다가 좋은 기회를 놓치는 일도 많았으니까. 물론 그건 내 운명이 아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넘어가 버리곤 했지만.
생각이 많은 타입이라 그런지, 내 안에 [감정]을 찾는 일은 꽤 어려웠다. 특히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일이 조금 어려웠다. 내가 이기적인 탓인가. 눈물을 흘리며 우는 것은 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슬픔이라는 감정과 주체하지 못하고 쏟아지는 눈물에 어쩔 줄 몰라 했던 십 년 전의 내가 떠오른다. 눈물을 흘리는 건 약해지는 거로 생각해서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해 보았지만, 그건 벗어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흘려보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을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도 버거워했던 내가, 이제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돌아보면 세월이 나를 닳게 하여 조금 자라긴 했나 보다. 어쩌면 내가 가진 결핍을 채우기 위해 그동안 해왔던 노력의 산물이 아닐까 싶기도. 그래도 아직은 생각보다 행동과 감정이 앞서는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이게 나라는 사람이란 걸.
1.
나의 정신적인 뿌리
엄마와 아빠의 자아
나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소환해야 할 두 사람이 있다. 바로 나의 뿌리가 되는 우리 엄마와 아빠. 우리 엄마와 아빠는 서로 비슷한 점도 있긴 하지만, 꽤 오랫동안 관찰자 시점에서 보았을 때 둘은 서로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인 걸 결혼하기 전까지 서로 몰랐으려나. 어떻게 이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을까. 그래서 종종 듣게 되는 부모님의 연애 스토리에 귀가 쫑긋해지는 까닭이다.
예를 들어, 우리 엄마는 엎드려 절 받기 식이라도 상관없으니, 뭐든지 직접 자기 손에 잡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실물로 드러나는 게 몹시 중요한 사람이고, 일과 목표 중심적으로 살아오셨다. 절대 손해 보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은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 가족 말고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관심도가 낮으셨고, 공감하는 능력이 아주 아쉬운 분이셨다. 굳이 이름을 붙여 분류해 보자면 유물론자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지.
반대로 우리 아빠는 마음, 믿음, 명예와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관심이 많으셨다. 남들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도 힘들어하고, 싫은 소리 듣는 것도 힘들어하고. 미디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 좋은 사람 같은 느낌. 다른 사람의 아픔에 진심으로 깊게 공감하셨던 분이라, 아버지 주변에는 사람이 참 많았다. 자기가 조금 금전적인 손해를 보더라도, 주변 친구와 지인들의 마음을 챙기고 다독이는 일에 앞장선다. 상대적으로 관계 중심적으로 사셨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분이셨다. 굳이 이름을 붙여 분류해 보자면, 관념론자에 가깝다.
너무나 다른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일까. 나 역시 두 사람과 비교했을 때 또 너무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곤 했다. 가끔 일관성을 잃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모순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 어떨 때는 유물론자처럼 굴다가, 때로는 관념론자처럼 굴더란 말이지. 예전에는 이런 모순적인 모습을 보일 때마다 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일관성 없는 모습에서 오는 정체성의 혼란 때문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내 안에 사는 부모님 두 분으로부터 온 각각의 자아가 서로 합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버리곤 한다. 나이를 먹고 연륜이 생긴 것일까, 아니면 생존을 위한 회피 기제가 발동한 것일까.
내 안에서 어느 날 갑자기 불쑥 튀어나오는 엄마의 자아와 아빠의 자아를 번갈아 마주하면서,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을 실감한다. 어떨 때는 남의 시선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목표한 바를 달성하고 성취하는 일에 집중하는 나도 나이지만, 어떨 때는 엄청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이 불편하게 느끼지 않을까를 고민하는 나도 나이기에. 매사에 유보하는 유보맨 속성도 어쩌면 여기에서 유래된 게 아닐까.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해야 좋을지 몰라 고민하게 되었다 보니.
2.
내가 느끼는 재미를
너도 알면 좋겠기에
스스로 가끔은 당혹스럽다고 생각될 정도로 이상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지만, 나는 이러한 나를 좋아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하겠어! 와 같은 논리적인 접근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다. 평소엔 멀쩡하게 지내다가 가끔은 갑자기 엉뚱한 모습을 보이는 나라는 사람이 재미있더란 말이지. 물론 나밖에 못 느끼는 재미이긴 하다. 내가 엉뚱한 짓을 하기 위해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 역시 꽤 재미있기 때문이다. 와닿게 설명해 보자면, 내가 쓴 글의 첫 독자가 나라는 느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내가 나를 재밌어하고 좋아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나를 무조건 재밌어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러한 나를 재미있어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내가 느끼고 있는 나라는 사람의 재미를 다른 사람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내가 가진 생각을 말로 표현하게 되는 것 같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니, 글로도 표현하고 있는 것일 테고. 이러다가 가끔 내 생각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는데, 그럴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그렇게 시작된 관계가 서로 깊어진다면 더더욱.
내 생각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게 무척 기쁜 탓일까. 반대급부로 이런 사람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마음을 쉽사리 열지 못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몰라도, 한 번 마음을 열면 꽤 많은 내용을 열게 된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쏟았는데, 내 마음을 상대방이 부담으로 느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갑자기 훅 움츠리게 되고 주춤거린다. 내가 상대방에 대해 오해했음을 알게 될 때,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그렇게 한동안 마음을 닫고 지내게 된다.
하지만 나는 사람을 워낙 좋아하는 성향이다 보니, 마음을 닫았다손 쳐도 잠시 휴업이지 폐업일 리 없다. 금방 또 나를 이해해 줄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난다. 누군가를 믿지 않고 살아갈 순 없기에. 이번에 만난 이 사람은 과연 내 마음을 잘 이해해 줄 만한 사람인가 습관적으로 더 의심하면서. 부담스럽지 않게 내 얘기를 꺼내야지 하고 다짐한다. 물론 그 다짐은 스스로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오해했을 때, 어김없이 깨져버리곤 하지만. 예전에는 의심하는 것이 나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의심이야말로 누군가를 더 깊게 이해하려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충분히 의심할 만큼 의심한 다음 상대방을 믿어주는 게 진짜 믿음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
문득 누군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꽤 재밌겠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엉뚱함을 사랑하는 사람. 스스로 재미있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걸 보여주고 싶은 사람. 매사에 모든 걸 의심하면서도 믿을 땐 철석같이 믿는 사람. 눈치 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누구보다 눈치 보는 사람. 아마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싶은, 날 닮은 너를 만날 언젠가를 막연하게나마 기약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