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비음악인 2화

Musician's Story - 2

들어가기에 앞서

<30살에 음악 시작하기 : 스스로를 음악인이라 소개할 수 있기까지(링크)>의 내용을 보다 깊게 소개드리는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 속의 제가 현재의 저와 맞닿을 즈음이면, 저는 과연 꿈꾸던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까요? 풀어쓴 목차와도 같은 위 글을 먼저 읽고 오시면,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더욱 재미있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비음악인 1화(링크) 요약 :
병약한 미소년(아님)이 한의대라는 목표가 생겨서 스스로 공부를 시작했다! 열심히 해서 성적이 막 올랐다. 고1 끝무렵엔 이과를 택했다.



기대받는 학생


문과반은 12반까지 있었던 것에 비해 이과반은 4개 반뿐이었습니다.


지역에서 공부 좀 한다며 중학교 때부터 이름을 날리는 친구들이 꽤 많았어요. 게다가 저의 가파른 성적 상승률을 보신 고2 담임 선생님께서는 제게도 기대를 거셨습니다. 이제 막 성적 올리는 즐거움을 깨닫기 시작한 제게는 그런 상황이 꽤나 부담이었나 봅니다. 저는 다른 생각은 일절 하지 않으며 완벽하게 공부에만 절여질 수 있는, 경기도 광주 소재의 한 기숙학원에 보내달라고 부모님과 선생님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겨울방학 2~3개월간 말 그대로 '특훈'을 받고 오게 되었죠. 재미있는 것은 학교 역사를 통틀어, 심지어 기숙학원의 친구들과 대화를 해봐도, 그렇게 스스로 걸어 들어간 사람은 저 하나뿐이었다는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웃기는 꼬맹이였네요.


하지만 아무 걱정 없이 공부만 할 수 있는 행복은 아주 잠시였습니다. 수련이 끝나고 학교로 복귀하니 부담감과 간절함, 욕심은 더욱 커졌어요. 학기 중에 '음악, 미술, 체육'중 하나의 예체능 과목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도, 어릴 때부터 노래하고 녹음하는 것을 좋아했던 저였음에도 불구하고 '미술 선생님이 성적을 잘 주신다'는 소문을 듣고선 별 고민도 없이 미술을 선택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죠. 잘하는 친구들은 많고, 이과생 수는 많지 않고, 성적 향상률이 더뎌지자 점점 조급해졌던 것 같습니다.


밥 먹을 때나 화장실에 갈 때도 단어장을 들고 다니고, 1학년땐 들지 못했던 특별반에도 들어가고, '수업 시간에 절대 안 자는 학생'으로 선생님들 사이에서 이름을 날리고, 10분 단위로 스케줄링하며 공부했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결코 쉬지 않았습니다. 점심을 먹고 와서 20분 엎드려 쉬는 것까지 계획적으로 쉬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지내다가도 학교가 끝나면 한 번씩 친구들과 PC방에 가기도 하고, 짧았지만 연애도 하고, 야간 자율학습에서 도망쳐 나오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지금까지도 가깝게 잘 지내는 친구들이 많이 생긴 시기였죠. 중학생의 저는 너무 소심하고 존재감도 없었기에, 이렇게 건강하고 즐겁게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제겐 정말 큰 행복이었어요. 그렇게 어느새 고3이 되었습니다.



고3


대한민국에서 '고3'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각별하죠.


입시 경쟁, 희망과 절망, 10대의 끝자락, 인생의 갈림길, 돌아오지 않을 청춘.. 단어는 같지만 누군가에겐 아름다운 추억이기도, 누군가에겐 크나큰 비극이기까지 할 정도로 폭넓은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뭐랄까, 나에게만은 결코 붙지 않을 것만 같던 그 명칭이 결국 제게도 붙었습니다. 새 학년이라는 시작의 감각과, 학생으로서 마지막이라는 끝의 감각이 동시에 느껴지는 생경한 느낌. 사실 딱히 달라질 것은 없었습니다. 그저 몇 년간 해오던 대로, 쉬지 않고 공부할 뿐이었죠.


아, 이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네요. 마냥 병약하고 소심하던 제가 중학교 2학년의 끝자락부터 지치지 않고 달려올 수 있었던 것은, 헌신적이라는 표현 말고는 생각나는 것이 없는 엄마의 서포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제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와주셨어요. 야자가 끝나면 차로 저를 데려오셔선 씻으라고 저를 화장실에 집어넣고 간식으로 햄버거를 만들어 주시곤 했습니다. 그럼 저는 씻고 나오자마자 방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또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 밤 12시가 넘어가려고 하면 그만하고 얼른 자라고 시간관리까지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새벽같이 깨워주시고.. 비몽사몽 한 채로 식탁에 앉아 단어장을 뒤적이며 아침을 먹었습니다. 어떤 날은 아침에도 학교에 데려다주시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몇 년을 이런 식으로 매일같이 서포트해주시던 그 일상도 이젠 고3이라는 이름 아래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근접


고3, 2학기가 되었습니다.


내신과 모의고사, 그리고 국내의 한의대 입학 전형들을 신경 쓰고 살펴보며 긴장된 나날을 보내고 있었어요. 그중 특히 저의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동국대 한의예과였어요. 다른 곳들은 대부분 말 그대로 고등학교 3년 내내 최상위권의 내신을 유지해야 했죠. 한의원 선생님의 ‘최소 전교 1등’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음을 체감했습니다. 하지만 동국대 수시는 상대적으로 지원 조건이 너무 어렵지 않은 편이었어요. 전형은 서류-논술-면접-수능 최저등급의 단계를 거치는 방식이었습니다.


공부를 시작한 이래로 늘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성장해 왔는데,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는 느낌은 또 색달랐습니다. 원체 싸움이나 경쟁을 싫어하긴 했지만, 그 특유의 생생하게 날 선 경쟁의 감각은 나름의 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어쨌든 너무 기쁘게도, 서류 전형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믿어지지 않았어요. 논술 시험에 응시하러 경주까지 가는 과정도 전부 뭐랄까,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습니다. 집과 학교만 반복하며 다니다가, 정말 뭔가 시작되려 하나보다, 하는 온갖 기대와 걱정이 가슴속에서 한데 뒤섞여 몰아쳤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몸에도 영향을 미쳤나봐요. 단지 논술 시험이었을 뿐인데도 온몸이 긴장을 해버려서 속병이 났습니다. 결국 엄마와 함께 하루 전에 내려가 잡은 숙소 근처 편의점에서 전복죽을 사서 데워먹었습니다. 그 맛은 물론 그릇의 온도까지 아직도 기억나는 듯해요. 가끔 이 날이 생각나면 지금도 일부러 편의점 전복죽을 사다 먹기도 합니다.


논술 주제는 굉장히 특이했습니다. 마지막까지 참고하려고 가져가 공부한 교과서, 참고서들이 무색한 내용이었어요. 주제는 바로, ‘사랑이 무엇인가? 사랑은 치료가 가능한가?’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참 낭만적인 주제였네요. 그리고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이 질문은 정답을 내놓아 보라는 것이 아니고, 이 친구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는지 살펴보려는 의도였을 것이라는 걸 말이죠. 저는 먼저 ‘사랑’을 정의했습니다. 비록 짧았지만, 연애를 해본 감각도 십분 활용했어요. 다음으로 ‘치료’를 정의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은 ‘치료’가 아닌 ‘치유’의 대상으로 봐야 한다고 논리를 전개하며, 사랑은 치유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냈어요. 나름 낭만적인 문장들도 곁들여서 말이죠.


시험이 끝나고 나왔는데 신기하게도 개운한 기분이었습니다. 지식의 정량적 계량과도 같은 시험이 아닌, 스토리텔링이 곁들여진 이런 글쓰기 시험이라니, 시험 자체를 즐겁게 본 느낌이었어요. 역시 저는 이과보단 문과쪽이 맞나봐요. 어쨌든 꽤나 느낌이 좋았고, 결국 논술에도 통과하며 면접 전형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면접 때도 물론 하루 전에 내려가 숙소를 잡았고, 당일 아침엔 전복죽을 사 먹었구요.



면접, 그리고 결과


면접은 무한 대기의 연속이었습니다.


하필 거의 끝 순서라서 3시간이 넘도록 대기 공간에 있었던 것 같아요. 가져간 참고서들을 전부 정독할 수 있을 지경이었죠. 그런데 놀랍게도, 책을 덮기 직전에 읽었던 부분에서 면접 질문이 나왔어요.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알던 지식인 것마냥 술술 대답했습니다. 여러모로 느낌이 좋았습니다.


결국 최종 결과 발표날, 제가 받아본 순위는 30번대였습니다. 합격 정원은 십 수명이었고요. 조금 아쉽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수능에서 최저 등급 조건을 맞추게 된다면 가능성이 없지 않았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학교 시절 내내 3 자릿수 등수를 받던 제가, 수백 명의, 그것도 난다 긴다 하는 공부 천재들 틈바구니에서 이 정도 성과를 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저는 부풀어 올랐습니다. 그간의 노력을 어느 정도 증명받은 기분이었어요. 그렇게 교실로 돌아온 저는 전략적인 수능 준비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과생이지만 수학이 약점이었던 저는, 언어와 외국어 영역에 더욱 시간을 쏟았습니다. 마지막까지 감을 잃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냉정하리만치 공평하게도 시간은 계속 흘렀습니다. 결국 4년간 열과 성을 다해 쏟았던 노력의 끝자락에서, 저 또한 마지막 전장에 피하지 않고 입실하게 되었습니다.



<비음악인 3화>에서 이어집니다.

#음악을 통한 감정적 유대와 세상의 연결을 꿈꿉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비음악인 1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