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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음악인 1화

Musician's Story - 1

들어가기에 앞서

<30살에 음악 시작하기 : 스스로를 음악인이라 소개할 수 있기까지(링크)>의 내용을 보다 깊게 소개드리는 시리즈입니다. 이 시리즈 속의 제가 현재의 저와 맞닿을 즈음이면, 저는 과연 꿈꾸던 모습으로 지내고 있을까요? 풀어쓴 목차와도 같은 위 글을 먼저 읽고 오시면, 이어지는 이야기들을 더욱 재미있게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꿈을 꾸고 계신가요? 의사? 변호사? 시인? 아이돌? 세계평화? 백만장자? 내 집 마련? 안정적이고 평범한 삶? 아니면, 반에 한 명씩은 꼭 이야기하던 대통령?



어느 날 찾아온 꿈


 저는 싱어송라이터입니다.


 곡을 쓰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아직 무명인 탓에 벌이가 굉장히 귀엽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곡도 쓰고, 활동도 하고, 브랜딩도 하면서 차근차근 나아가는 중입니다. 이런 삶도 누군가에게는 꿈같은 생활일 수 있겠다고 의식한 지 얼마 되지 않기도 했습니다만, 애초에 저의 뮤지션 커리어는 굉장히 짧은 축에 속합니다. 첫 싱글을 2020년에 발매(링크)했거든요.


 음악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지금 이렇게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는 제게는, 놀랍게도 꿈이 없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몸이 그다지 좋지 않았어서 꿈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지,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도 그저 하루하루 학교에 무사히 다녀오는 것만이 삶의 전부인양 지냈어요. 그래서 ‘기억의 출발선’부터의 그 긴 세월 동안, 강렬한 몇 장면들을 제외하곤 이렇다 할 기억이 없을 지경입니다. 어른들이 물어볼 때나 몇몇 직업을 공식처럼 대답할 뿐이었고, 딱히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그나마 좋아하는 것이라고는 몸이 약해 늘 드나들던 한의원 냄새, 노래방, 수업 시간에 몰래 판타지 소설 읽기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몸이 성장하면서 체력이 좋아졌는지, 머리가 일을 시작했나 봅니다. 여느 때처럼 별생각 없이 살아가던 어느 날, 흰 가운을 입은 한의사 선생님이 참 멋있어 보였습니다. 병약하고 소심한 저였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선생님에게 여쭤봤습니다. "한의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질문을 받은 한의사 선생님도,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들은 엄마도 놀라시는 눈치였습니다. 딱히 뭘 하고 싶다, 하기 싫다, 의사 표현도 제대로 안 하던 애가 갑자기 한의사에 관심을 가지다니, 그럴 만도 했겠다 싶습니다. 선생님은 대답해 주셨습니다. "공부를 엄청 엄청 잘해야 한단다." 저는 다시 물었죠. "얼마나요?" 한의사 선생님은 씨익 웃으며 솔직히 대답해 주셨습니다.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이 대답을 들은 전과 후의 제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최소 전교 1등."



스스로 공부하다


 성적이란 것에 처음 관심을 가지고, 성적표를 들여다봤습니다.


 전교 등수가 100등 안에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아, 내가 이 정도였구나. 공부를 해야겠다. 의지력이 치솟았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닌, 필요에 의해 스스로 찾아서 하는 공부를 그때부터 시작했습니다. 한 번도 다녀본 적 없던, 학원에 보내달라며 엄마를 조르기도 했습니다. 학원이 끝나면 우르르 놀러 가는 친구들을 등지고 집에 와서 또 공부를 했어요. 의지와 함께 힘도 솟았던 걸까요? 겨울방학 내내 공부는 물론, 줄넘기를 엄청나게 했습니다. 매일 3, 4천 개가 넘도록 말이죠. 이때 키도 굉장히 많이 자랐습니다. 새 학기가 되어 학교에 가니 반 친구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어요.


 중학교의 마지막 해는 그간 밀린 진도를 따라잡으며 보냈습니다.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진학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되었죠. 공부를 더 많이 할 수 있는 한일 고등학교나 민족 사관 고등학교 같은 특별한 곳에 가고 싶었지만, 중학교의 마지막 학기쯤이나 되어서야 처음으로 두 자릿수의 전교 등수를 성적으로 받은 제가 넘기엔 너무 높은 문턱이었어요. 결국 집에서 멀지 않은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하면 된다길래, 해보니까 되더라


 상위권 성적의 고등학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깡패 학교'로 유명했죠.


 그래서인지, 입학하자마자 봤던 시험에서 반 7등이라는 성적을 받았어요. 처음이었습니다. 반에서 한 자릿수 등수를 받아본 것이 말이죠. 얼떨떨한 기분이었습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편애하던 담임 선생님은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앞자리에 앉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여러 의미로 굉장한 처사였네요.


 아무튼 그렇게 얼떨결에 '공부 잘하는 애'축에 속해져 버린 저는,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 아주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받았던 전자사전은 버튼이 잘 눌리지 않을 지경까지 혹사당했습니다. 학원은 다니지 않았어요. 중학교 때 잠시 다녀본 바로는, 학원이 또 다른 사교의 장인 것도 귀찮고 번잡스러웠고, 이동 시간이나 학원비도 아까웠습니다. 학원에 다닌다고 자동으로 성적이 오르는 게 아니라는 것도 체감했고 말이죠.


 그래서 제가 선택한 전략은 인터넷 강의였어요. 지금은 온라인 클래스가 다양화되고 좋은 수업도 굉장히 많지만, 당시에는 인터넷 강의가 처음 시장에 나오기 시작한 때였고, 강의의 가치는 학생의 자율성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컸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노다지였어요. 황금 같은 지식과 노하우가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여러 사이트를 찾아보다가 - 사실 몇 군데 되지 않았습니다 - 마음에 드는 한 곳에서 과목별로 수업을 수강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도 많은 선생님들이 '하면 된다'라고 동기부여를 해주셨는데, 해보니까 정말 되더라구요. 저는 그렇게 '교과서 위주로 공부하면서 성적을 팍팍 올리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문과와 이과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선택지가 다가왔습니다.


 한의대를 목표하던 저는 당연히 이과를 선택했습니다. ‘교차 지원’이라는 것으로 문과에서도 한의대를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이었단 것을 차치하더라도, 맥락 없이 공부해야 하는 ‘깡 암기 과목’이 많은 문과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어요. 하지만 화학2생물2 같은 과목엔 맥락은커녕 한글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실 저는 이과라기보단 문과 성향을 가진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제 작업은 글에 기반하고 있거든요. 아버지도 글을 쓰십니다. 게다가 요즘엔 곡을 쓰기 위한 작업의 시작 자체를 글 한편을 쓰면서 들어갈 지경입니다. 이 내용은 나중에 따로 소개드려 볼게요. 아, 물론 고1 끝자락의 선택은 문과와 이과 둘 중에서 택하자니 그랬다는 이야기이고, 결국 저는 예술 계통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음악을 하고 있는 제가 사실은 문과 성향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과에서 한의대를 지망하며 공부를 했다’ 정도가 되겠네요. 두 글자로 요약하자면 ‘짬뽕’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하.


 하지만 그렇게 다양한 성향의 시각을 고루 배워온 덕분에, 체계적이고 밸런스 좋은 지금의 제가 된 것 같습니다. 곡 하나를 작업하는 방식에서부터 신곡 프로모션이나 브랜딩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서 말이죠. 지금의 저는 ‘음악만’해온 사람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공부만‘해온 사람처럼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곡 작업을 할 때도 영감이나 운에만 의존하지도 않으며, 감각이나 느낌 없이 이론적으로만 접근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중간 어디쯤, 가장 성하진다운 곳'에 알차게 자리할 수 있게 되었달까요?



<비음악인 2화>에서 이어집니다.

#각자의 세상과 세상이 이어지는 세상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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