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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빈 Jun 28. 2022

가로등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스물, 안(眼)>

  오래간만에 친구들과 술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려는 찰나 가로등 하나에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가로등은 분명 하얗거나 노란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까. 허나 내 눈에 들어오는 가로등의 색은 티 없이 밝은 초록빛이었다. 내가 취했나 싶어 가까이 가서 보기도 했지만 분명한 초록빛이었다. 뒤에 있는 도로의 가로등은 흰색이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살던 아파트라 줄곳 이곳을 지나다녔을 텐데. 언제부터 그런 색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이토록 무관심했던 것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집까지 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에 너의 지분도 넉넉할 텐데. 나는 이제서야 너를 봐주고 말았다.

 

  집으로 들어와 씻은 후, 침대에 누워서 생각을 해봤다. 원래 초록색이었을까 하고. 그럴리는 없었다. 어릴 적 내 기억의 가로등은 분명히 흰색이었으니까. 너무나 오랜 일이긴 하지만, 초등학교 때 키우던 구피가 죽어버려 그 야밤에 묻어주러 놀이터에 가야 한다고 떼를 쓰던 그날. 땅을 열심히 파서 고이 묻어주곤 조금은 버거운 마음에 치켜든 고개.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가로등은 새하얀 색이었으니까. 그게 그렇게 희고 둥글길래 보름달인 줄 알고 좋은 곳에 보내달라 빌기도 했으니까.

 

  가로등은 힘이 들었던 것이다. 해가 저물기 시작할 때부터 사람이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새벽까지 넌 그 자리를 항상 지켜왔다. 그렇게 두 눈 부릅뜨고 밤을 지새우는데 어떻게 몸이 성할 수 있을까. 너는 아무래도 병이 들었을 수도 있겠다. 빛을 내며 우리를 보는 눈이 녹색으로 변해버렸으니, 녹내장 정도로 해둘까. 실제로 녹내장은 색과 관련이 없긴 하지만 그냥 이렇게라도 진단을 해주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제야 알아채 준 내가 조금은 덜 미안해질까 하고, 내가 조금은 널 이해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무관심. 그러고 보면 지금 알아챈 가로등은 물론 다른 것들에게도 꽤나 무관심한 편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너는 남들에게 관심이 별로 없어 보인다며, 정이 없는 사람 같다는 말이었다. 그 당시의 나는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무관심해지기로 최선을 다해 발악하고 있었으니까. 내 관심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끼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으니까. 나의 관심은 억센 비와 같았다. 오롯이 나의 궁금증만을 우선으로 한 수많은 질문들. 개 중엔 분명히 바늘 같은 빗방울들도 수 없이 많았을 테다. 누군가 비 내리는 날에 피를 철철 흘리며 돌아가는 뒷모습에서 깨달았다. 나는 또 한 명을 다치게 했구나.

 

  말을 아꼈다. 궁금증의 선을 강제로 끌어내렸다. 좋게는 남의 불편한 부분을 묻지 않는 배려있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나에게 불편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선은 어디까지 내려가고 있는가. 궁금한 것을 참아내느라 궁금한 것이 없는 사람이 될 것만도 같았다.  너희들의 말과 행동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던 것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관심 속에서 생겨난 예견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희가 내 욕을 해도 진심 아닌 장난이라 믿을 수 있었고, 나의 생각과 맞지 않는 행동을 해도 존중할 수 있었다. 싫어하는 행동에도 가끔 따라주길 자처했고, 날 떠나려고 해도 그게 더 나은 길일 수도 있겠다며 무심한 척 보내줄 수 있었다. 나의 무관심은 무관(無關)한 마음이었다.


  궁금한 것들을 이어 선에 매달고 가로등 앞으로 갔다. 미안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푸념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한참을 혼자 주절거리다 가로등에게 물었다. 나 괜찮은 거 맞냐고. 가로등은 당연하게도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또 물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괜찮은 걸까. 미련한 눈빛으로 한참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떨구려던 찰나, 흔들리는 불빛을 보았다. 초록빛의 가로등은 천천히 깜빡이다 이내 하얀빛으로 돌아왔다. 그게 너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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