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기계' 이 책이 내게 남긴 이야기
내가 처음 접한 죽음은 중학교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이다. 그때 난 학교 시험 때문에 외할머니 상에 가보지 못했다. 그저 시골에 내려가기 위해 화장대 앞에서 눈물을 삼키던 엄마의 모습만 보았을 뿐… “엄마 죄송해요… 그땐 엄마의 슬픔을 안다고 생각했어.”
대학 때 어느 날 저녁 아빠가 전화를 받았다. 어렸을 때 방학 때, 명절 때마다 함께 했던 사촌동생이 죽었다고… 나는 그때 며칠을 멍하게 지내고 슬퍼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내가 사랑하는 이모의 슬픔을 안다고 생각했다. “이모 죄송해요…”
20대 중반쯤 어렸을 때 나를 키워 주시고 자주 뵈었던 친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아직도 할머니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가, 할머니가 내 볼을 만지던 그 굳은살이 있는 손이… 할아버지의 무표정하지만 슬쩍슬쩍 나를 지켜 봐주신 그 표정이 기억나기에… 난 너무 슬펐고 그래서 '아빠도 그렇겠지…'라고 생각했다. 장례식장에서 아빠의 그 웃는 표정에 흐르지 못하는 물을 머금은 빨간 눈의 의미가 어느 정도의 슬픔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아빠 죄송해요…”
그리고 나는 30대 중반이 되었다.
아는 지인 중 참 밝은 한 분이 계셨다. 어떤 날은 너무 신나서 어떤 날은 어느 누가 기분이 좋지 않아서 누군가를 위해 장난을 치셨던 분이었다. 그분이 주셨던 밝은 에너지와 건네주셨던 따뜻한 말들은 가끔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 느끼게 했다. 그렇게 따뜻했던 분이 갑자기 떠나셨다. 그때 난 그분의 가족들부터 생각이 났다. 내게도 아이가 있기에… 한참을 울었던 거 같다. 아이들은… 가족들은 어떻게 하나… 이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꽤 짧은 시간만에 아무렇지 않게 되고, 그리고 그 아무렇지 않음에 자연스러움을 느끼고… 어느 순간 아무렇지 않은 나를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 슬픔을 공감한다고 생각했구나… 그 슬픔의 깊이를 안다고 생각했구나…’
죄송했다.
그저 내가 가진 슬픔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슬픔을 안다고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그리고 함부로 공감한다고 생각했던…
그 깊이를 짐작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죄송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했던 시간 중 가장 슬픈 시간은 죽음이다.
점점 나이가 들어갈수록 죽음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진다.
심지어 준비되지 않은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정도로 그 단어에 익숙해져 간다.
삶에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 간다.
하지만 아무리 익숙해져도 우리는 그 죽음 앞에서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을 만난다.
그리고 그 죽음에 대해 위로를 받는 우리도, 위로를 하는 우리도 익숙하지 않다.
그러기에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슬픈 시간에 있는 사람들의 울음을 함부로 공감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 슬픔을 짐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럴 수 없음을 알았어야 했다.
내가 외할머니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 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 함께 목욕탕에 가서 창피하여 빨리 집에 가자고 했던 그 시간을…
외할머니의 품에 애교 많은 손녀로 폭 한번 안겨본 추억하나 없는 것을...
후회하며 사무치게 슬퍼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사촌동생의 죽음을 맞이했을 때
함께 첫 바이킹을 타며 같이 무서워하고 같이 웃었던 시간을 그리워하고
시간이 지나서 쑥스러운 마음에 반갑게, 가깝게 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며
그저 너무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해 슬퍼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주방에서 고봉밥을 담아 주시며 더 먹으라는 그 따뜻한 손을 그리워하고,
옷장 저 안쪽에서 한 장씩 용돈을 꺼내 주시며 내 웃음 한번 보고자 하셨던 그 마음을 느끼며,
그저 울고 슬퍼하는 것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 슬픔에 집중하는 것뿐… 엄마의, 아빠의, 이모의 슬픔을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감한다 착각했을 뿐… 내가 착각했던 그 공감은 그들의 마음에 닿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내 울음이 내 슬픔이 그들의 슬픔과 함께 한다고 느꼈을 뿐…
“역사가는 과거로 들어가서는 안되고, 과거가 그에게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Tiedemann.)
마음도 이와 같다 타인의 마음에 들어가고자 하면 안 되고, 타인의 마음이 자신에게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공감이란 타인의 마음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오만한 시도다. 오직 통감만이, 세상의 마음이 자신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방법이다. _ 김흥중의 ‘은둔 기계’ 중
우리는 살면서 공감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공감한다 하고, 감정에 공감하고, 그 공감이 그 사람에게 위로가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그 슬픔의 깊이를 같이 할 수 없다.
그 슬픔에는 세상을 떠난 사람과 본인 사이의 시간과 감정이 담겨 있기 때문에 같은 시간과 감정을 공유하지 않은 타인은 공감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 공감한다는 말, 얼마나 아플지 슬플지 안다는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저 세상을 떠난 사람을 내 감정으로 슬퍼하고,
그 사람이 떠나 슬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감할 뿐…
**'은둔 기계' 이 책은 문장 하나하나 만을 던지지만 그 의미들은 내게 이야기를 가져왔다. 내 삶에 그 문장들을 대입해 보며 생각할 수밖에 없는 시간을 주었다.
** 이 글을 남기게 해 주신 '은둔 기계'의 저자 김흥중 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