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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ny Dec 30. 2022

[ Nope]Drop


카이에 뒤 시네마가 사랑하는 감독으로 등극한 사람답게 영화 내내 작가주의 냄새가 진동한다.

좋게 이야기하면 패기가 넘치고, 나쁘게 말하면 과도하게 무모했던 데뷔작인  '겟 아웃'의 성공으로부터 시작하여  '어스'까지 따라갔지만, 카이에나 미국의 호평과 달리 필자는 의구심만 증폭이 되었다. 


하지만 이번 놉의 예고편이 공개되었을 때에 전작들과 달리 약간은 기대를 했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누가 봐도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예고편에서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단어 'Shot'을 통해 'Shot'의 이중적 표현을 그려낼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견하였지만 이렇게 풀어낼 주는 몰랐는데,  즐겁게 보면서도 영화에서 뿜어지는 거대한 오만함이 유독 거슬렸다. 


그의 영화는 다른 감독들의 영화와는 달리 영화가 끝난 다음에야 '영화의 메인 테마'를 중심으로 관객 스스로가  감독이  뿌려놓은 영화 속 심벌들을 하나하나씩 재해석, 재조립하여 영화를 다시 껴 맞추게 하는 재능이 있는 감독이다.  그 'Main theme'는 지금 현재 미국에 거주하는 afro-american이  느끼는 공포이다.(혹은 '일 것이다.')  '겟 아웃'이 '인종차별'을 '어스'가 '트럼프 시대의 증오'를 담아내었다면 이 영화는 'Shot의 이중적 의미'를 그려낸다.  그렇기에 필자가 보았을 때  그의 영화를 움직이게 만드는 동력은 영화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밖에 있다.


실제 영화도 IMAX로 촬영했지만 영화안의 카메라도 IMAX이다. 


이 재조립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영화를 일부러 듬성듬성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사이의 빈 공간들과 알 수 없는 기호들은 '타지인'들로 인해 더욱 부각된다. 백인이 그랬고, 지하에 살던 사람들이 그랬고, 생명체도 그렇다.  중요한 것은 그의 영화 속 '타지인'들이 기호들을 만드는 것들이 아니라 만들어진 기호들이 가리키는 것이 'Thing'이라는 점이다.    즉 알 수 없는 공포가 아닌  관객들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공포감이 메타포적으로 파편화되어 영화 전반에 뿌려져 있다가 후반부에 직접적으로  표현될 때의 공포인 셈이다. 조던 필의  영화가 늘 동시대성인 이유도,  꽤나 진한 'PC'적 색채를 띠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의  모든 기호들은 감독의 의도대로 영화 속 '타지인'으로 향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감독이 이야기하고 싶던  영화 밖의 '테마'를 향한다. 그리고  이 '타지인'의 공포는 사회의 공포로 자연스레 연결된다.  


 여기에서 문제점이 발생하는데  위의 말을 반대로 뒤집으면  소재거리를 알아야 그의 영화를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인종차별'이나 '트럼프의 장벽'같이  모두가 알고 있는 '혐오'를 기반으로 한  문제점이라기 보다 우리 모두가 즐기고 별생각 없이 핸드폰으로 촬영을 하지만 마음의 저쪽 구석에서 '그러면 안 돼'라고 외치는 양심에 대한 이론적 이야기이기에 소재에 대한 이해도가 요구가 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전작들과 달리  영화 내내 무언가를 떨어트린다. 동전이든, 키든, 사람이든, 깃발이든, 모든 소재거리를 떨어트린다. 이 떨어트리는 행위로 인해서 드디어 '타지인'에 대한 약점도 알게 되고, '타지인'을 찍을 수 있는 자본도 얻게 된다.  이 토사물들을 통해 거대한 생명체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가 그의 필모에서 제일 오만해 보이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저 위에서 내려다본, 아니 이 영화에서 유일한 기록자이자 제대로 동작되는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사람이 '감독' 임을 상기해야 한다.(영화 안의 카메라는 다 꺼지지만 조던 필의 카메라는 촬영을 지속함과 동시에 심지어  하늘로 올라간다.  이상하지 않은가? Shot의 역설, 관음증 등을 비판하면서 본인의 카메라는 모든 걸 다 촬영한다. ) 


조던 필에게 관객은 아래에 있고 감독과 영화는 위에 있는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  지상에서 에메랄드는 감독이 떨어트린 소재를 통해 'jean jacket'을  남긴다.  영화가 끝나고 이제 남은 건 에메랄드처럼 영화에 떨어진 파편들을 가지고 관객이 조립하는 행위일 뿐이며 감독 스스로  그 파편들을 누군가는 주프 박처럼 보관함에 넣어 보관하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끝나면 역시나 관객들은 이 파편들을 가지고 재조립을 한다.  여기에는 어떤 계약관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재조립을 한다.  분명히 관객과 영화, 관객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하게 만드는 몇몇 고전들과 방향성은 같음에도 불구하고 달라 보이는 이유는  관계가 영화와 관객이 아니라 기호와 관객이기 때문이다.  관객이 재조립하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기호이다. 영화는 조립하는 순간 사라진다. 그들이 만드는 것은 영화라는 힌트를  통해 만들어진 유희적 퍼즐이며 자랑할 수 있는 성과물인 셈이다.   마치 보관함에 놓인 신발처럼. 인스타에 올리는 사진처럼. 


p.s - 촬영감독 역이 베르너 헤어조크였으면 역대급 자기 고백서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영화 내내 베르너 헤어조크와도 같은 인상을 일부러 풍기는 마이클 윙컷의 명연기에 감탄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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