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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송정 Feb 02. 2023

정답은 없다

조재휘의 '시네마 리바이벌'을 읽고

나는 <방구석 1열>(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JTBC 프로그램으로 지금은 종방)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방구석 1열>에서 소개하는 영화의 뒷이야기를 들으며 내 좁은 시야가 넓어짐을 느끼고, 때때로 반짝하는 아이디어를 얻어 글을 계속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읽은 책 <시네마 리바이벌>(2020년 9월)도 80여 편의 영화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었다. 마치 <방구석 1열>의 책 버전같달까? 작가 조재휘는 <국제신문>(1947년 창간한 부산의 대표 신문)에 연재한 기사와 <씨네21>에 실었던 글들을 모아 이 책을 펴냈다고 한다. 영화를 사랑해 영화평론가 되어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책을 만들면서 얼마나 정성을 들이고 마음을 담았을까 싶다.


그중에서도 가장 집중해서 읽은 편은 박찬욱 감독의 <박쥐>에 대한 글이었다. 얼마 전 <방구석 1열> 재방송으로 감독 코멘터리를 봤던 영화였는데, 이 책에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영화를 해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박찬욱 감독이 뭐라고 했더라' 생각하며 다시 <방구석 1열> 47회를 찾아 '잠깐 멈춤' 버튼을 눌러가며 봤다.




'사랑과 구원'이라는 안경을 통해 본 <박쥐>

2009년 영화 <박쥐>가 개봉했을 때 나도 이 영화를 보러 가긴 했다. 다 보고 나오면서 '내가 다시는 박찬욱 영화를 보나 봐라' 했지만.(하하)그랬던 생각이 최근 바뀌는 계기기 있었는데 영화 <헤어질 결심>의 각본집까지 찾아 읽으면서 그가 만든 영화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글로 본 영화에 숨어 있는 적확하고 치밀한 의도를 발견하며 감독이 그간의 영화들을 세상에 내놓을 때 어떤 말을 하는 싶었던 걸까 궁금해졌다. 애정하는 '영화의 전당(부산국제영화제 행사가 열리는 곳) 라이브러리'로 달려가 다시 보지 않겠다던 <박쥐>를 결국 다시 봤다.


박찬욱 감독이 방구석 1열에 편안한 차림으로 앉아 영화 <박쥐>가 구원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박찬욱 감독을 검색하면 무신론자라고 나오지만, 집안은 대대로 가톨릭을 믿는다고 하니 가톨릭의 정수(精髓)인 '사랑', 그리고 '구원'에 이르려는 노력을 영화에 담았던 것 같다.


특히 감독은 '사랑'을 낡은 갈색 신발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단다. 여자 주인공 태주(김옥빈)가 밤마다 집 앞 골목을 맨발로 뛰어다니며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어 할 때, 남자 주인공 상현(송강호)이 흡혈귀가 되어 생긴 괴력으로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리고는 자기 신발을 벗어 하얗고 작은 발에 신겨주는 장면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 신발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나오는데 둘이 구원받을 수 없는 행위(흡혈)를 멈추고 처연한 빛이 내리쬐는 곳으로 가 죽음을 기다릴 때도 태주(김옥빈)는 자신의 신을 벗어 던지고 '갈색 신발'로 갈아 신는다. 그러고는 몸이 재가 되어 툭 떨어지는 신발을 보여주며 영화가 끝난다.


어쩌면 그들은 순수한 사랑의 증거인 신발을 신는 것으로 구원으로 나아가기 위한 마지막 고해를 대신하고는, 그들만의 세상으로 걸어갔는지도 모르겠다.




'자본주의'라는 안경을 끼고 본 <박쥐>

그런데 이 책 '시네마 리바이벌'에서는 똑같은 장면을 너무나 생소한 '자본주의'라는 관점으로 보고 있다. 흡혈귀는 자본주의의 주인이라 착각하는 자본가가 노동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것을 상징하는 오브제이며, (감독이 사랑을 극명하게 보여주려고 만든) 여주인공 태주가 골목을 뛰는 장면에서도 작가는, 신발이 아닌 골목 너머 저 멀리 보이는 고층아파트에 시선을 둔다. 태주가 골목을 달리는 것을 지붕 넘어 보이는 고층빌딩의 세계, 상류층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갈망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상현과 태주를 이어 준 그 신발을 신고 마지막까지 사랑을 간직한 채, 구원받을 수 있길 바랐던 둘의 모습을 '상현이 태주를 끌어 안고 죽음을 자처함으로써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맨얼굴인) 착취(흡혈하는 것)의 연쇄에서 벗어나 속죄한다'고 보고 있다. 같은 영화를 다르게 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만, 막상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은 놀라웠다.




정답이 없는 인생에서 정답부터 찾는 습관

그런데 그보다 더 놀라웠던 것은 이 책에서 감독의 생각과는 너무 다른 결로 영화 <박쥐>를 평한 것보다, 내가 이 책을 읽은 뒤 여러 번에 걸쳐 <방구석 1열>을 봤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의 의미는 감독이 말한 의도대로 봐야 한다는, 그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하면서.


정답이 없는 인생을 살면서도 누군가가 알려주는 정답(이라고 생각되는 말)이 마음을 편하게 해 줄 때도 있지만, 별 생각없이 습관처럼 영화를 보는 방법에도 정답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내가 오랫동안 했던 일이 답안지에서 정답을 찾아 동그라미 쳤던 시간이어서인지 아직도 내 안에 그 흔적들이 남아 있음을 자주 본다. 글을 쓰면서는 나만의 것을 나만의 방식으로 풀어내고 싶어 <방구석 1열>을 즐겼으면서도 정작 이 책 <시네마 리바이벌>을 읽으면서는 습관처럼 또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영화를 만든 감독과 작가는 이런 의도로 만들었다는데요?'라고 생각한 걸 보면.


그러고 보면 정답이 없는 창작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수학 문제의 딱 떨어지는 정답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왜냐하면 내 것, 내 경험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그 길을 잘 갈 수 있는데 흔들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네마 리바이벌> 작가의 참신한 관점보다 <방구석 1열>에 나온 감독의 코멘터리가 영화를 보는 정답일 거라고 생각했던 이번의 경험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해두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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