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은 맑은 얼굴-
치매야, 고마워~
엄마의 기억 잃음이,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는 느림의 미학이,
때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아득한 눈빛이,
낯선 이를 대하듯 가족을 바라보는 조금은 긴장한 표정이,
폐암 말기의 단어가 귀에 꽂히지 않는 엄마의 멈춰진 머리가
우리 가족에게 희망과 위안이 될 줄이야.
그래 맞아. 치매야, 정말 고맙다.
8년 전 3시간이 넘는 검사를 통해서 비로소 듣게 된 치매라는 단어는 엄마를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만들었다. 긍정의 단어로만 자식들을 교육시키고자 했던 철학도 치매 앞에서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왜 나여야만 하는지 묻고 또 묻는, 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의 단어를 엄마는 2년 동안 내뱉었다. 그녀의 용감한 언어는 거칠었고 시댁을 향해, 아빠를 향해 있었다.
시간을 보약 삼아 이 엄숙한 상황에 우리 모두가 익숙해지고 받아들이고 적응할 때쯤, 폐암말기의 시한부 인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거친 언어를 쉼 없이 내뱉지 않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와 고통의 맘을 고마운 치매가 살짝이 지워주고 안아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8년 만에 새 식구로 들어오게 된 폐암을 엄마의 치매는 자기의 방식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엄마는 본인이 폐암이라는 걸 모른다.
엄마의 피부는 맑다. 적당히 아픈 사람의 흔적은 있다. 살짝 검어진 얼굴로 그러나 절대 과하게 나쁘진 않다. 폐암 말기의 환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다.
기억의 상실이 주는 기쁨을 매일 면회 가면서 우리는 느낀다. 요양병원에서 엄마는 안정을 찾고 맑은 피부를 유지한다. 모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없고, 인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시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지도 않고, 치매가 주는 아득한 마음의 안정이 폐암말기의 엄마를 지키고 있었다.
엄마의 근육은 멈춰졌다. 큰 웃음도 없어졌고 아주 옅은 미소만 어쩌다 한 번씩 보여준다.
그래도 너무나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기억의 상실이 결코 최악의 일이 아니라는 걸 엄마의 얼굴을 보면서 느낀다.
폐암을 잊게 해 준 치매야~ 고마워.